1번가 전력 60분, 소망의 거울
그날은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쉬는 날이었고 약속이 있었다.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려고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공과금을 처리하곤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그저 통장에 있어야 할 것보다 큰 숫자가 적혀있어서 당연한 제스쳐를 취했던 게 다였다. 무언가 빼먹은 게 있는지 한참 생각하며 거래내역을 확인하다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시 보지 않아도 될 병원 이름이 화면 언저리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는 지출되지 않을, 지출할 수도 없을 비용이었다. 바로 그것이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이제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그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고, 그 어떤 노력도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으므로 해리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아마 기억이 너무 옅어진 탓이리라. 그것보다는, 30분 후에 약속이 있다는 걸 상기해낸다. 집에서 영화보기로 했었지. 해리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상념들은 금세 잊혔다. 그날의 해리엇 버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해리여야만 했다. 낄낄대며 장난을 걸고 개를 쓰다듬고 소파를 마음대로 차지하고, 옆에서 핀잔을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실없는 농담을 하며 영화를 고르다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발견하곤 낄낄 웃을 때 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네가 나온다며 말을 얹는 헤이거에게 나 나오는 영화나 보자, 하고 말하며 영화를 재생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간과한 장면이 있었다. 해리 포터가 소망의 거울 앞에 서는 부분. 꼬마 포터가 투명망토를 벗고 거울 앞에 서자 그 뒤에 다정히 웃고 있는 그의 가족들이 비쳤다. 꼬마 포터는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소망은 소망일 뿐 이뤄질 리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그 자리에는 자기 자신 뿐이다. 가족들은 죽었고 꼬마 해리는 여전히 고아였다. 오래된 영화화면을 보고 있던 영화 바깥의 해리는 옆 자리에 앉은 얼굴을 살핀다. 옆에 앉은 이가 이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당장 저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해리는 옆에 앉은 헤이거를 힐끔 보다가 가벼운 투로 말을 잇는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영화 속의 해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저런 거 앞에 서면 난 휴가 나와서 퍼질러 있는 내가 보일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로 앞에 저런 거울이 주어진다면 해리는 거울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후회만 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가족이 다시 돌아온다면, 하는 생각은 영화 속의 해리도, 영화 밖의 해리도 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옆에 앉은 헤이거도 어쩌면 비슷할 터였다. 그래서 해리는 모르는 척 헤이거를 끌어안고 어깨에 뺨을 기댔다. 전해지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그 때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면, 병원이라도 옮겼더라면, 하는 의미 없는 후회들이 쏟아졌다. 후회하는 동안에도 장면은 넘어가고, 영화 끝에서 꼬마 해리는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해리엇은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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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했어. 백우주는 밥을 먹으려고 했어, 하는 투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그러면 아이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일상적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무심하게, 무심한 표정으로 손등을 문질렀다. 백우주는 죽음의 방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고 아이는 귀찮다는 듯 짧은 대답만을 던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정해진 문장이 있었다.
-그래서, 난 언제 찍어줄 거야?
-너는 그냥 우주잖아.
아이가 유난히도 단호한 순간이었다.
눈도 없는 겨울이었다. 숨을 뱉으면 그대로 얼어 땅에 떨어질 것 같았다. 뉴스에선 바다가 얼어붙었다고 했다. 이례적인 추위라는 앵커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흘 째 바다가 녹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백우주는 꼭 사흘 째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연락 한 통 없는 걸 보면 죽었을지도 몰랐다. 생존신고라며 열두 시가 넘어가기 전에 걸던 전화도 딱 사흘 째 없었다. 집에 찾아가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비밀번호도 귀에 박힐 듯 많이 들었고 위치도 알았지만 가지 않았다. 입버릇처럼 하던 얘기였으므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우주는 아이가 정말 죽는 장면을 떠올린다. 내가 정말 죽으면 찾아와서 찍어줘야 해. 그런 말도 얼핏 했던 것 같았다. 정작 아이는 한 번도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준 적이 없었지만.
아이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죽는다고 해도 온전히 소멸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었다.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간다. 별은 아무것도 사용치 않지만 인간은 너무 많은 걸 두고 갔다. 깔끔하고 예쁘게 죽지 않을터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이에게 죽음의 이미지는, 악취 혹은 부패였다. 그런 걸 찍고싶을리가 없었다. 백우주가 말한 어떤 죽음의 방식을 떠올려도 예쁘지 않았다. 그래서 더 허한 기분이 들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백우주를 찍어주지 않을 것이다. 별도 아니고, 우주도 아니고, 제 세상도 아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