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디
1차 창작

D가 거리에 있던 시절, A가 그런 말을 했었다. 중요한 말은 대문자로 적는 거라고, 그래서 우리 이름도 대문자로 쓰는 거라고. A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자신들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구역질나게 잘 알고 있었다. 성도 없이 알파벳에서 따온 한 글자짜리 호칭을 겨우 붙들고 뭉친 애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타인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돌멩이 같은 이름이더라도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필요했다. 이름이 없다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거리에서 쫓겨나듯 수감된 이후에도 D는 자신에게 붙은 이름을 놓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앞으로의 날들도, 이전의 시간들도, 돌아가는 법도, 유지하는 법도 모르겠어도, 살기 위해서는 D라는 이름을 붙들고 있어야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표류하다 여유가 생기면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름이나 자신처럼 알파벳 이름을 가진 아이들을 곱씹어보기도 했다. 그것은 과거의 웅덩이 속에서 부유하는 것과 같았다. 몸의 살이 다 불어서 흩어지고, 그렇게 해서 정말로 그를 아는 이가 아무도 없게 될 때까지 거기에 머물 것만 같았다.


그런 D에게 거기서 나오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원한다면 손을 잡아주겠다고 네로가 말해주었다. D는 네로를 따라가기로 했고, 그의 손을 잡고 과거의 웅덩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나니 네로의 옆에 서서 북쪽으로 같이 가달라고 말할 용기도 생겼다. 그리고 D는 네로의 곁을 채우고 설 수 있게 되었다. 네로가 뒤돌아서면 D가 바로 그 자리에 있을 거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뜻이었다.


 

북쪽은 황량했다. 바싹 마른 나무들과 얼음 덩어리, 그리고 동행인들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옷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 바람 때문에 떨어져나갈 것처럼 시렸다. 숨을 뱉으면 뿌연 입김이 연기처럼 흩날렸고 하늘은 흐리멍덩했다. 북쪽의 날씨는 보통 둘 중 하나였다. 눈이 곧 쏟아질 예정이거나, 눈이 쏟아지거나. 대체로 그들이 가야할 길은 하얬다. 네로와 D, 일행들은 아무도 밟지 않은 듯한 길을 개척하고 있었다. 걷는 자리마다 발자국이 남았으나 일행들은 놀러온 사람처럼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봤자 다시 눈이 쌓여 그들의 흔적을 덮을 것이었으므로. 일행 중 누군가가 웃으며 무어라 내뱉는 소리가 눈 속에 파묻혔다. 춤추듯 흩날리는 하얀 눈이 세상을 고요하게 만들었다.


이건 D가 보고 싶어 했던 풍경이었다. 이따금 쉬어갈 때면, D는 제법 기쁜 얼굴로 하늘을 눈에 담았다. 눈은 비처럼 땅으로 바로 떨어져 스미지 않고 바람에 날려 한참 허공을 돌다가 쌓이곤 했다. 네로는 추운데 뭘 그렇게 봐,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D가 눈 내리는 걸 보고 싶다고 말했던 걸 떠올렸는지 옆에 앉아 곁을 주었다. 추위 때문에 작게 욕설을 뱉는 와중에도 D의 꽁꽁 언 손을 놓지 않고 잡고 있기도 했다.


눈 내리는 게 질릴 즈음에도 D는 여전히 눈을 마음에 들어 했다. 비록 발을 내딛을 때마다 시리기는 했으나, 네로의 왼편에 서서 하얀 길을 걷고 있노라면 네로의 까만 머리카락이 유난히 선명하게 보인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눈은 도화지 같았고 네로는 그 위에서 누구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 네로야말로 정말 중요한사람 같았다. DA가 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중요한 말은 대문자로 적는 거라는, 그 실없는 이야기. 그러나 가끔은 그런 것을 믿게 되어서, D는 깨끗한 눈밭을 종이 삼아 네로 하이솔린이라고 대문자로 적어보곤 했다.


저녁이면 바람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일행들은 대충 눈을 치우고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드러누워 별을 구경하곤 했다. 하늘에 박힌 별이 유난히 반짝였다. 남들이 그러는 동안 D는 눈밭에 무언가를 써내리고 있었다. 네로가 와서 물었다.


뭐해?”


그 자리에는 네로의 이름이 대문자로 적혀있었다. 네로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건지, 옆에 쪼그려 앉아 이미 쓴 제 이름을 심술궂게 문질러 지워버렸다. D가 네로를 바라보자 되려 상대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너 여기 내 이름 쓰고 있었어? 다 대문자네.”


네로는 D가 소문자를 쓰는 게 유창하지 않아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D는 아파, 하고 제 이마를 문지르다가 그 뉘앙스를 알아채고는 이유를 덧붙였다.


중요한 건 그렇게 적는 거래서.”


네로가 자신의 중요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D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했다. 네로는 허, 하고 웃었다. D의 머리카락을 대충 헝클어트리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대? 하고 말았다.



그 실없는 이야기는 흘러가지 않고 뇌리에 남았다. 네로가 D에게 새 이름을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계획된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일이었다.

어느 눈 내리는 밤, D가 하늘을 지켜보는 동안 네로는 땅에 쌓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네로는 D가 눈밭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두었던 것을 떠올렸다. 중요하니, 어쩌니 하는 말을 되새겼다. 네로는 그 말이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제 것의 이름을 눈밭에 썼다. 가끔 그런 웃기는 소리에 어울리고 싶은 변덕이 들곤 했기 때문이었다. 일자로 죽 선을 긋고, 곡선을 그린다.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D는 처음부터 대문자였다. 문장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 같은 이름. 네로는 기묘함을 느꼈다. D의 이름마저 네로 것이어야 했는데, 제 것이 아닌 이름 같았다. 뒤따르는 것은 불쾌감이었다. 표정을 구기고 서있자 D가 의아한 듯 표정을 물끄러미 살피다가 옆 자리에 섰다. 습관처럼 왼쪽이었다. 네로의 희미한 왼쪽 시야를 지키고 서있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네로는 불만스러운 듯 애꿎은 눈 더미를 발로 찼다. 그가 화가 났나 싶어 바라보는 한 쌍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이거 잘 녹지도 않네.”

그래도, 예쁘지 않아? 눈 말이야.”

몰라, 추워서 싫어.”


그러다가 눈밭에 철퍽 앉아버렸다. 네로의 뱀 같은 눈이 D를 훑듯 바라보았다. 머리를 굴리다 제 애인에게 주고 싶은 이름을 제 멋대로 떠올렸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해결하면 되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울릴 것 같은 이름을 본인이 쥐여 주면 되는 거였다. 깜짝 선물이라도 준비하듯이. D의 팔을 꽉 잡고는 제 쪽으로 당겨 앉히는 것도 순식간이다.


, 이거 중요한 거니까 잘 봐.” 


네로는 눈밭위에 D라고 쓴 걸 가리켰다. D는 네로가 제 이름을 써주었다고 생각하고 무얼 할 지 지켜보았다. 손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네로는 손가락이 시려 빨개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글씨를 써내려갔다. D뒤에, A, R, Y, A그리고 뒤에 따라 붙은 단어는 하이솔린’. D는 쓰인 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다리야 하이솔린.


그게 이제부터 네 이름이야.”


네로는 어리둥절하게 선 D의 손을 잡아다가 깍지를 꼈다. 눈밭에 닿아 차가운 손길은 뱀이 은근하게 몸을 감아오는 것과 비슷했다. 손가락에 남은 오래된 흉터들을 쓸어내리고 난 뒤에, 약지에 손끝이 닿는다. 손톱을 세워 긁듯 할퀴었다. 작은 흉을 만드는 행위는 꼭 반지라도 끼워주는 듯 다정했다.


생각해보니까, D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대문자잖아.”


되묻기도 전에 이마가 맞닿는다. 다소 거친 맞닿음이었다. 중요한 건 대문자로 쓰는 거라며? 하는 소리를 덧붙이면서 말을 이었다. 네로 개인의 소유인 것에 대명사가 붙어있는 것은 말이 안 됐다. 그러니까 새 이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은 어린아이가 새로 산 인형에 붙어있는 라벨을 떼어내고, 제 나름대로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과 유사했다.


그러니까 너한테 이 이름을 줄게, 다샤.”


D에게는 여전히 네로 하이솔린을 거절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그럴 줄도 모르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 D가 네로의 말에 순순히 복종했듯이, D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제 새 이름으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 네로.”


그렇게 해서 D는 다리야 하이솔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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