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먼지처럼 흩날리던 눈송이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함박눈이었다. 언 길 위가 하얗게 덮이기 시작하면서 버스가 도로를 거의 걷고 있었다. 버스 라디오에서는 도로가 정체되었다는 말과 함께 작은 사고 소식들이 흘러나왔다. 케빈 웨스트키는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봤다. 눈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연인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휴대폰 대기화면에서 시선을 떨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늦고 싶지 않았다. 그야,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니까. 그래서 케빈은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지나는 정류장에서 딜런의 집으로 가는 건 그리 멀지 않았다. 걸을만한 거리였다. 눈이 내리지 않았더라면 스케이트보드라도 타고 갔으리라.
이따금 꼬맹이들이 서로에게 눈덩이를 뭉쳐 던지는 함성이 귓가에 꽂히기는 했으나, 거리는 평소보다 고요했다. 눈은 여전히 기세 좋게 내리고 있었다. 케빈은 손에 입김을 불며 걸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뺨이 금세 차게 식었다. 바람과 눈이 닿는 부근이 온통 빨갛게 얼어버렸다. 옆구리에 낀 스케이드보드 때문에 손을 온전히 주머니에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얼어붙어 감각이 없는 발을 뒤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들어가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뱉은 말 음절 하나하나가 하얀 김이 되어 흩날렸다.
그때, 어떤 풍경이 케빈을 멈춰 세웠다.
뿌옇게 흐린 유리 너머로 온갖 꽃과 나무들이 보였다. 은은하게 가게를 채우고 있는 주황 불빛을 보고 있자니 꼭 다른 계절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케빈은 멍하니 유리문을 쳐다보다가 문득 문 위에 무언가 붙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언가를 홍보했을 광고지는 눈과 바람에 젖어 엉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까지만 알아 볼 수 있고 그 뒤는 알록달록하게 얼룩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문구에, 케빈은 홀린 듯 문 위에 찍힌 불특정 다수의 손자국 위로 손을 올렸다. 바람 사이로 울리는 종소리가 계절과 맞지 않게 경쾌하고 청량했다.
“어서오세요!”
점원이 환하게 웃으며 케빈을 반겼다. 케빈은 점원의 환대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다가 카운터에 커다랗게 붙은 팜플렛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광고지에 적혀있던 문장이 번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적혀있었다. 광고지에 적힌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는 문구 뒤에는 꽃을 선물하라는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한 문구가 놓여있었다. 여느 꽃집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었으나 그런 냉소적인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럴 성정도 아니었거니와 제집에 있을 연인이 아른거려서, 그리고 잘 포장된 장미꽃다발들 뒤로 펄펄 날리는 눈송이가 꿈결같이 아름다워서 케빈은 오히려 꽃다발이 얼마냐고 물어버렸다.
***
장미꽃잎에 쌓인 눈송이를 털어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기라도 했던 듯 문은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열렸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딜런이 케빈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꽃다발이 조금 뭉개졌다. 장미 잎이 서로 맞부딪히며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서 온 듯한 향이 퍼졌다.
“전화도 안 받길래 걱정했는데… 형, 세상에! 설마 걸어왔어요? ”
“길이 너무 막혀서……. 자, 선물.”
케빈이 딜런에게 꽃다발을 내밀자 눈이 동그래졌다. 딜런은 그래도 형이 먼저라며 꽃다발을 한 편에 밀어놓곤 부랴부랴 타월이며 옷을 꺼내주었다. 그러고서도 케빈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에 쥘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연인의, 빨갛게 얼어붙은 손이 원래 색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뗐다.
“근데 웬 꽃이에요?”
케빈은 이유를 생각하려다 꽃집에 붙어있던 광고지를 떠올렸다. 사고는 더 뻗어 나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는 문구에 머문다. 케빈은 다른 세상 같던 꽃집과 눈에 번진 광고지, 팜플렛과 꽃다발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야기로는 충분히 의도가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케빈은 말문을 여는 대신, 소파 너머로 상체를 숙인다. 등받이를 꽉 잡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술 너머로 전하는 온기가 겨울이 아닌 것처럼 마냥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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