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들떠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거리에 사람들이 즐비했고 어디에서나 노래가 울려 퍼졌다. 온갖 조명들이 온갖 색깔들로 빛났다. 심지어는 세현과 우진이 출근하는 병원 나무에도 꼬마전구들이 걸려있었다. 어디에서나 새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출근길에 듣는 라디오에서도 내년이 무슨 해고, 휴일이 며칠이고, 한 해의 끝이 어떻고… 진행자와 게스트의 웃음소리에서도 즐거움이 묻어났다. 텔레비전을 켜면 새로운 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분주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세현은 다가오는 새해가 행복하기보다는 불안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이후에는 그런 불안감이 극대화 되어 초조하게 달력을 바라보거나 생각에 잠기는 날들이 늘었다. 1월 1일, 오른팔이 검푸르게 변해서 숨을 겨우 고르던 우진의 모습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창백하던 얼굴이 더 창백해진 채로 무력하게 졸던 모습, 오랫동안 깨지 못해 몇 번이고 맥박을 짚어야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불쑥 두려웠다. 세현은 오랜 시간을 우울과 불행에 잠식되어있었고 그 시간은 습관처럼 남아 스스로의 행복을 의심하게 만들곤 했다. 세현은 우진이 애정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헤실 웃어줄 때면 너무나도 행복해서, 바보 같은 소리지만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제 세상 속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의 웃음을 영원토록 붙잡아두고 싶은 소망도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면 예전처럼 불행이 닥쳐 올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새해가 가까워지자 이 습관적인 불안이 예전의 악몽을 불러일으켰다. 우진이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혹은 이 모든 시간들이 꿈처럼 녹아 버릴까봐 떨었다.
세현의 이상을 먼저 감지한 것은 우진이었다.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붙어있으니 당연했다. 그는 잘 때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우진아, 하고 이름을 부르거나 울먹이기도 했다. 우진은 세현보다 늦게 잠들곤 했으므로, 뒤척이다가 세현이 앓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우진은 세현이 뭘 무서워하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 여기 있잖아. 그런데 왜 그래, 하는 원망 섞인 호소가 목 끝까지 올라오기도 했으나, 또 한편으로는 속이 상하기도 했다. 그 순간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세현 뿐만이 아니었다. 물 먹은 솜인형처럼 무력하게 늘어지던 몸과, 의식이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지는 것 같던 감각이 이따금 선명했다. 1월 1일과 새해 카운트다운이 두 사람에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크리스마스가 끝나 치운 장식 탓인지, 두 사람의 집조차 어딘가 황량하게 느껴졌다. 세현은 자신의 불안을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는데, 시리우스조차 세현을 보고 무슨 일 있냐는 듯 걱정스레 낑낑거렸다.
결국 세현과 우진은 12월 31일에 휴가를 냈다. 행복한 휴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한 해의 끝에서 다음 해로 넘어가는 그 시간에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은 며칠 잠을 못 자 퀭한 얼굴로 일정을 조정하고, 누군가 그에 대해 물으면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어조도 들뜬 투가 아니라 가라앉아 있어 사람들도 더 묻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즈음 웃고 즐거워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12월 31일, 세현은 이번 해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고 믿는 사람처럼 우진에게 붙어있었다. 특히 해가 지고 저녁이 되자 우진을 끌어안는 몸짓이 간절하게까지 느껴졌다. 이 집의 크고 까만 개도 무언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안절부절 못하며 두 사람 옆에 몸을 말고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까칠하게 굴던 시온이도 야옹거리며 곁을 서성거렸다. 너희 왜 그러냐는 듯한 태도였다. 세현은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화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우진의 등에 얼굴을 묻고 뺨을 비볐다. 그 모습이 꼭 어린아이가 어리광을 부리는 것 같기도 했다. 틀어놓은 텔레비전 속에서는 제야의 종을 누가 치게 되었는지 소개하고 있었다. 지난해와 새로운 해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조용한 방안을 채웠다. 광장에 모인,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들은 날이 추워 귀까지 빨개져 있었음에도 더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가족으로 보이는 이들, 연인으로 보이는 이들, 친구로 보이는 이들, 누구 할 것 없이 즐거워보였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때였다면 두 사람도 웃으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들을 보며 함께 행복해했을 터였다. 나쁜 기억이 그 시간을 오염시키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날은 둘을 감싸고 있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우진은 세현의 무릎에 앉은 채 자신을 안은 손을 달래듯 쓸어주었다. 우진의 손끝은 그리 따뜻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의 체온이라고 느껴질 정도는 되었다. 세현은 온기가 느껴지자 그것을 간직하겠다는 듯 우진의 손을 한참 매만졌다. 그러다가 옷소매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손이 아주 잠시 멈칫하다가 흉터에 닿았다. 공교롭게도 우진이 세현을 잡은 손은 오른손이었으므로, 손끝에 흉터가 걸리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세현이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지. 우진이 낮게 세현아, 하고 신음처럼 이름을 불렀다. 다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세현아.”
“…응, 우진아.”
세현은 눈치를 보다가 다시금 우진의 팔을 매만졌다. 흉터야 말로 우진이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므로. 자신의 애인이 움찔 떠는 감각을 손끝으로 느끼면서 안정감을 찾으려고 했다. 두 사람이 그러는 동안 TV 속 사람들이 새해를 알리는 종을 치려고 서있었다. 10, 9, 8, 7… 사람들이 힘찬 목소리로 새로운 해까지 카운트다운을 세기 시작하자, 우진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 말은 마치 내가 여기 있으니 우린 괜찮을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카운트다운이 끝나도 네 옆에 있을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세현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숨을 들이쉬고, 꽉 막힌 목소리로 말했다.
“우진아, 너한테 잘 자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 울지 않고…. 새해에.”
“…세현아.”
“내가, 그렇게 말해도….”
“나 여기 있어.”
우진이 뱉은 문장은 단단했다. 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우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그러는 동안 새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럼… 미리 얘기할게.”
세현은 중요한 일을 맞이한 듯 비장한 표정으로 숨을 삼키고는, 우진과 이마를 맞댔다. 비록 눈가는 불그스름했지만, 입은 미소짓듯 웃고 있었다. 웃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자, 우진아… 좋은 꿈 꿔.”
세현은 안다. 한 해의 끝에서 다음 해의 시작으로 넘어갈 때마다, 어쩌면 올해 같은 불안감에 시달릴지도 몰랐다. 그러나 예전처럼 나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세현의 세상에서, 어쩌면 세현 본인보다 소중한 이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진이 눈에 세현을 한껏 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딘지 불그스름한 눈으로 웃으면서.
“응, 그럴게.”
세현은 우진의 말 한 마디에 새삼스럽게 안심한다. 우진은 죽지 않고 1월 1일 아침에 눈을 뜨리라. 그것이 기뻐서, 세현은 우진을 꽉 끌어안고 입맞췄다. 시리우스가 짧고 단호하게 컹, 하고 짖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세현은, 그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듯 우진도 제 곁에 있어줄 거라는 확신을 갖기로 했다. 떠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세현의 세상은 올해도 무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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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갑작스러운 이주 같은 것이다. 누군가를, 어딘가를 떠나야하는 것. 그동안 쥐어왔던 것들을 놓아야하는 일.
클로토 페리는 언제나 남겨지는 사람이었다. 떠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이에게는 그런 선택지 같은 건 없었다. 클로토에게는 어디론가 간다는 것이 돛 없이 밤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막막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안전하기를 택했다. 실패했던 건, 실패할 것 같은 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위험한 짓을 굳이 나서서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원래대로라면 폐병원엔 발도 들이지 않았을 텐데. 이런 예측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싫은데. 어떻게 준비조차 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무서운데,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움직여야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판단 하에 두려움을 누르고 움직이려고 했다.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원래대로라면 뒤에 숨어 상황을 관망했을 그는, 사람들과 함께 촛불을 끄러 달려들었다. 목덜미가 뜯길 거라고는 예상도 못한 채로. 사람이었지만 더는 사람이 아닌 것의 이빨이 그의 동맥을 끊어놓았다. 어지러움과 당황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순식간이었다.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 우스갯소리. 세상이 흐려질 때 클로토 페리는 그런 말을 떠올렸다. 아, 여기 오지 말걸. 괜히 열 내지 말걸. 그런 의미 없는 후회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타들어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의식이 사그라들면서 고통도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클로토 페리의 앞에는 피 흘리며 쓰러진 그의 몸을 끌어안고 이름을 부르는 애쉬 서머스가 있었다. 찢긴 채로 널부러진 스카프에도 피가 묻어있었다. 피가 비현실적으로 고여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모르타가 눈물을 떨어트리는 것을 지켜봤다. 달래줄 수 없었다.
불행히도 그는 떠나는 법을 몰랐다.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고 뇌가 정지했지만, 클로토 페리는 여기에 있었다. 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본인도 알 수 없었다. 싸늘한 제 육체를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준비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유서도 없었다. 당황하는 클로토와 달리, 클로토의 시신은 눈을 감고 있어 제법 평온해보였다. 오히려 그의 몸을 꽉 붙잡은 손이나, 황망한 얼굴 같은 것들이 이상했다. 클로토는 자신이 죽었다면 누군가 데리러 오게 되는 건지, 아니면 이곳의 귀신들처럼 여기에 묶이는 건지 생각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데리러오지도 여기 묶이지도 않았다. 촛불이 꺼지고 사람들과 함께 빠져나갔을 때, 황망한 기분마저 들었다. 정말 끝에서 이렇게 됐구나 싶어 헛웃음이 났다. 클로토는 축 늘어진 자신의 손 위로 화상자국으로 가득한 손이 덮였는데도 토닥여줄 수 없다는 것에서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그리고 모르타와 몇 년간 쌓였던, 못 다한 이야기를 다신 할 수 없을 거라는 것도 뼈져리게 느꼈다. 클로토 페리는 제 이름처럼 영원히 과거에 남게 될 거라는 것도.
클로토는, 어차피 과거로 남을 거라면 제 육체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싶었다. 사람들이 제 마지막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보고 싶었다.
장례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런 건 잘 몰랐다. 슬퍼하는 시간을 가지자는 모르타의 목소리를 가만히 곱씹으며 제 목덜미를 매만지는 게 고작이었다. 육체가 탈 때는 조금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의자 하나를 꽉 채우는 몸이 겨우 한 줌 즈음 되는 뼛가루로 남는다는 게 신기했다. 그의 부모님이 우는 것을, 주변인들이 찾아오는 것을 지켜봤다. 자신이 죽어도 아무도 혼자 남지 않는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클로토는 슬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고인의 주변인이 죽음을 슬퍼하는 시간을 갖고 떠나보낼 수 있는 거라면, 당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미 죽은 이는 책을 쓸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으니 그건 오로지 제 몫이었다. 눈물 고인 얼굴로 애쉬의 손을 잡고 선 모르타를 관망했다.
떠나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떠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아 있을 때는 방법을 모르는 일을 시도해보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제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스스로 알아내야했다. 사람을, 이 장소를, 쥐고 있었던 것들을 놓아주어야했다. 살아있을 때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그래야 했다. 떠난 사람. 과거. 그게 클로토 페리의 새로운 이름이었다. 클로토는 떠난 사람, 이라는 단어를 입 속으로 굴리며 생전의 제 이름이 적힌 팻말을 바라보다가 실소했다. 그리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기분을 여행 짐처럼 품고 걸음을 옮겼다.
그건 해방감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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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토 페리 - 루크 C. 카르디 연성교환(사랑이라는 걸 알았을 때 / 짝사랑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사랑이라는 말이 싫었다. 정확히는 무서웠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예측할 수 없는 무언가였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이라서, 꼭 어떤 재해처럼 느껴졌다.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호감이 사랑으로 싹트기 전에 뿌리 뽑았다. 제 행성을 지키기 위해 매일 삽으로 바오밥 나무의 싹을 파내는 어린왕자처럼, 이것이 내 세상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이름이 아니라 성으로 불러달라거나, 우리가 아니라 나와 당신이라고 말하거나. 그런 식으로 모두를 밀어내면서 선을 긋고 거리를 둬야 내가 괜찮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을 향한 마음도 삼키고 억눌러야했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필체가 어떤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그런 것들을 하나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새벽녘에 떠오르지 않길 바랐다.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나는 도서관 사서일 뿐인데, 직업적 호기심이라고 해도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왜 자꾸 찾아와서 마음을 키우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연을 가장하는 태연함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지 말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일은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찾아와도 괜찮을 것 같다고. 그래도 얼굴이 보고 싶어서,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당신이 방문하던 요일이, 시간이 가까워지면 괜히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면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일이 아무리 바빠도, 잠깐 쉬며 커피를 마시는 그 틈 사이로 당신이 비집고 들어왔다. 라떼를 좋아할까, 블랙커피를 좋아할까. 산미가 있는 게 취향일까, 아니면 고소한 게 취향일까. 아주 사소한 게 궁금해졌다. 알고 싶지 않았는데 한편으론 더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을 쓰고 옆에 이유를 덧붙였다. 이러면 안 되는 이유들을. 당신은 결혼했었고, 아내가 죽었고, 나는 나이가 너무 많고, 겁쟁이에, 우리는 어울리지 않으며 공통점도 없는 것 같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마음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서 가지를 뻗고 결국 내 세상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도피하고 싶어 만드는 핑계라는 걸 알았으나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말들이 책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길어져도 그 뒤에 끈질기게 따라 붙는 것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이 좋았다. 혼자일 때면 몰래 이름을 부르고 싶어질 정도로.
당신은 알고 있을까. 사랑의 첫소리와 당신의 이름 첫소리가 같다는 것을. 그 소리를 발음하기 위해 말린 혀가 입천장에 닿아 간질간질한 감각과 내가 당신을 바라볼 때 드는 감정이 퍽 유사하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의 앞에선 당신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를 일이 없을 것이었으므로, 아마 모를 것이다. 몰라야했다. 감히 영원을 말하건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일은 영원토록 없을 것이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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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혼식장에 있다. 해리엇 버크와 헤이거 데이비스가 오늘 결혼한다.
결혼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옆에 오래도록 머물러있겠다는 어떤 약속 같은 것으로 느껴져서 낯설었다. 어렴풋이 결혼이라는 단어는 평생 내 것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과 연애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전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연애를 한다면 언제나 나는 떠나는 사람이었고 사실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직업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훌쩍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아침에는 미국에 있어도 점심 즈음에는 도착지가 아주 먼 비행기를 타는.
헤이거와도 그런 식으로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헤어지더라도 친구로서 남을 거라고는 믿었다. 오랜 고향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어렴풋이 생각도 했었다. 나는 너무 장난스럽고 가벼운 사람이라서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너는 심지어 결혼까지 했던 사람이었고 애까지 있었는데. 그런데 네가 파도 앞에 선 모래성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서, 나보다도 멀리 떠날 것 같아서 붙잡아야 했다. 처음에는 분명 그런 핑계였는데 오히려 네가 나를 잡아두고 있었다. 구속당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목적지가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올 자리가 너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괜찮지 않을 것 같게 만든 사람이었다. 붙잡아달라고 말했을 때 티켓을 받아주던 흉터 남은 손이 아직 선했다. 그날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와인도. 눈썹을 늘어뜨리며 순하게 웃던 얼굴이 간지럽고 조금 낯설었는데, 어렴풋이 옛날 언젠가를 생각나게 해서 좋았다. 자연스레 나오는 어린 시절 얘기, 애정과 걱정 섞인 잔소리 같은 것들. 유년부터 지금까지를 한 번에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래도록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청혼을 받아주었다. 만약 헤이거 데이비스가 청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청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에 든 장미다발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청혼을 하던 얼굴은 사진으로 하나 남겨놓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꽃다발을 받아들 때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자. 우리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짧게 입 맞췄던 것도 마냥 행복했다.
나는 이따금 불안했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달라서 우리는 같이 갈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끝이 나버리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우리는 모양은 다르지만 홈이 맞는 퍼즐조각처럼 맞아들어갔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다. 나는 조금 낯선 웨딩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다가 네 손을 잡았다. 언젠가 정장을 입고 결혼식장에 한 번 섰었을 헤이거 데이비스는 나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숨을 삼키다 손을 맞잡아주었다. 꽃다발을 물고 꼬리를 치며 뛰어다니는 브루노와, 그 전쟁 속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지나서, 레드카펫을 밟고 단상 앞에 선다. 고개를 돌리자 드물게 웃음짓는 벤틀리 영감님과 눈이 마주친다. 어색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을 뒤로하고, 단상 위에서 네가 나를 들어올려 안았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이름 모를 그림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환하게 웃는 얼굴 위로 색색으로 갈라진 환한 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빛을 뒤집어 쓴 얼굴위로 입 맞추며 생각한다.
우리는 옛이야기처럼, 아마 오래오래 행복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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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준비가 되질 않았나 보다.
말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심이 아닌 말들을 진심인 것처럼 포장해 준비해왔었다. 처음부터 가볍게 하기로 한 연애였잖아, 나 원래 연애 길게 못 하는 거 알잖아…. 내 상상 속의 나는 훨씬 더 연기를 잘했다. 한 번도 너를 사랑했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서늘한 표정으로 단단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그러질 않았다. 거짓말이 서툰 아이 같은 음성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몰래 서리를 하고 거짓말을 했을 때도, 면접을 볼 때도, 심지어 전쟁 중 군인인 척 연기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나는 꼭 겁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네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표정일지 보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가 사랑하던 갈색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별을 통보하고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휴가까지 쓴 거였다. 아무렇지도 않기엔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네가 좋아져서 망설이고 있었다. 후회할 짓 같은 건 만들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정말로 헤어지고 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죄책감 때문에 헤어지겠다고 결심해놓고 그랬다. 메마른 입술을 겨우 떼곤 감춰뒀던 말을 토해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었어. 넌 아내도 있던 사람이잖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는데……. 네가 언젠간 가족들이랑 다시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해놓고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 하고 겨우 진심을 뱉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방황하는 너를 붙잡으려고 연애를 말했지만, 언젠간 네 아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해리엇 버크? 그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함께 있고 싶어서 애써 묻어뒀는데, 생사도 모르는 네 아내에게 질투마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이 했을 시간을 부러워하며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조금 숙였다.
“출근한다는 거 거짓말이야. 너랑 헤어지고 로마에 가려고 했어. 나 휴가도 썼다?”
혼자 걷는 로마의 거리는 사랑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거리를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건 옆에 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테니까. 그 거리에, 쏟아지는 햇볕 아래로 찡그리듯 어렴풋이 웃던 네 얼굴이 있어서였다. 무언가 이야기하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던 다정함에 집중하느라,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발짝 늦게 알아채던 순간들 때문이었다. 나는 함께 이탈리아로 갔을 때 끊은 모든 티켓 위에 네 이름을 써뒀었다. 헤이거 데이비스라고 어느 때보다 애정을 담아 또박또박 적어두었다. 그래서 너 없이 걷는 로마의 거리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글씨를 적어 내릴 때 쏟은 마음이 너무 커서. 다시 한 번, 같이 햇살이 쏟아지던 그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런데, 갈 자신이 없네. 후회할 여행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확히는 헤어질 자신이 없는 거였다. 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티켓을 내밀었다. 오늘 날짜와 다빈치의 이름을 딴 공항 약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리고는 겨우 네 얼굴을 바라본다. 헤어지자고 해놓고 정말 우스웠지만, 기만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붙잡아줄래, 헤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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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먼지처럼 흩날리던 눈송이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함박눈이었다. 언 길 위가 하얗게 덮이기 시작하면서 버스가 도로를 거의 걷고 있었다. 버스 라디오에서는 도로가 정체되었다는 말과 함께 작은 사고 소식들이 흘러나왔다. 케빈 웨스트키는 초조하게 창밖을 내다봤다. 눈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연인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휴대폰 대기화면에서 시선을 떨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늦고 싶지 않았다. 그야,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거니까. 그래서 케빈은 버스에서 내려서 걸어가기로 결심했다. 지금 지나는 정류장에서 딜런의 집으로 가는 건 그리 멀지 않았다. 걸을만한 거리였다. 눈이 내리지 않았더라면 스케이트보드라도 타고 갔으리라.
이따금 꼬맹이들이 서로에게 눈덩이를 뭉쳐 던지는 함성이 귓가에 꽂히기는 했으나, 거리는 평소보다 고요했다. 눈은 여전히 기세 좋게 내리고 있었다. 케빈은 손에 입김을 불며 걸었다.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뺨이 금세 차게 식었다. 바람과 눈이 닿는 부근이 온통 빨갛게 얼어버렸다. 옆구리에 낀 스케이드보드 때문에 손을 온전히 주머니에 밀어 넣을 수도 없었다. 얼어붙어 감각이 없는 발을 뒤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얼른 들어가야지, 하고 중얼거리며 뱉은 말 음절 하나하나가 하얀 김이 되어 흩날렸다.
그때, 어떤 풍경이 케빈을 멈춰 세웠다.
뿌옇게 흐린 유리 너머로 온갖 꽃과 나무들이 보였다. 은은하게 가게를 채우고 있는 주황 불빛을 보고 있자니 꼭 다른 계절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케빈은 멍하니 유리문을 쳐다보다가 문득 문 위에 무언가 붙어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무언가를 홍보했을 광고지는 눈과 바람에 젖어 엉망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까지만 알아 볼 수 있고 그 뒤는 알록달록하게 얼룩진 글자가 눈에 띄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문구에, 케빈은 홀린 듯 문 위에 찍힌 불특정 다수의 손자국 위로 손을 올렸다. 바람 사이로 울리는 종소리가 계절과 맞지 않게 경쾌하고 청량했다.
“어서오세요!”
점원이 환하게 웃으며 케빈을 반겼다. 케빈은 점원의 환대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다가 카운터에 커다랗게 붙은 팜플렛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광고지에 적혀있던 문장이 번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적혀있었다. 광고지에 적힌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는 문구 뒤에는 꽃을 선물하라는 다소 상투적이고 진부한 문구가 놓여있었다. 여느 꽃집에서나 쓰일 법한 말이었으나 그런 냉소적인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럴 성정도 아니었거니와 제집에 있을 연인이 아른거려서, 그리고 잘 포장된 장미꽃다발들 뒤로 펄펄 날리는 눈송이가 꿈결같이 아름다워서 케빈은 오히려 꽃다발이 얼마냐고 물어버렸다.
***
장미꽃잎에 쌓인 눈송이를 털어내고 초인종을 눌렀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기라도 했던 듯 문은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열렸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딜런이 케빈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꽃다발이 조금 뭉개졌다. 장미 잎이 서로 맞부딪히며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서 온 듯한 향이 퍼졌다.
“전화도 안 받길래 걱정했는데… 형, 세상에! 설마 걸어왔어요? ”
“길이 너무 막혀서……. 자, 선물.”
케빈이 딜런에게 꽃다발을 내밀자 눈이 동그래졌다. 딜런은 그래도 형이 먼저라며 꽃다발을 한 편에 밀어놓곤 부랴부랴 타월이며 옷을 꺼내주었다. 그러고서도 케빈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따뜻한 머그컵을 양손에 쥘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다. 소파에 앉은 연인의, 빨갛게 얼어붙은 손이 원래 색으로 돌아올 때까지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뗐다.
“근데 웬 꽃이에요?”
케빈은 이유를 생각하려다 꽃집에 붙어있던 광고지를 떠올렸다. 사고는 더 뻗어 나가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라는 문구에 머문다. 케빈은 다른 세상 같던 꽃집과 눈에 번진 광고지, 팜플렛과 꽃다발 이야기를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그 이야기로는 충분히 의도가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케빈은 말문을 여는 대신, 소파 너머로 상체를 숙인다. 등받이를 꽉 잡고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술 너머로 전하는 온기가 겨울이 아닌 것처럼 마냥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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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가 전력 60분, 소망의 거울
그날은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쉬는 날이었고 약속이 있었다. 몇 가지 번거로운 일을 처리하려고 은행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공과금을 처리하곤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그저 통장에 있어야 할 것보다 큰 숫자가 적혀있어서 당연한 제스쳐를 취했던 게 다였다. 무언가 빼먹은 게 있는지 한참 생각하며 거래내역을 확인하다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시 보지 않아도 될 병원 이름이 화면 언저리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시는 지출되지 않을, 지출할 수도 없을 비용이었다. 바로 그것이 어머니의 부재를 실감하게 만들었다. 이제 아무리 돈을 쏟아 부어도 그의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고, 그 어떤 노력도 소용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으므로 해리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아마 기억이 너무 옅어진 탓이리라. 그것보다는, 30분 후에 약속이 있다는 걸 상기해낸다. 집에서 영화보기로 했었지. 해리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상념들은 금세 잊혔다. 그날의 해리엇 버크는 아무렇지도 않은 해리여야만 했다. 낄낄대며 장난을 걸고 개를 쓰다듬고 소파를 마음대로 차지하고, 옆에서 핀잔을 주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실없는 농담을 하며 영화를 고르다가 해리 포터 시리즈를 발견하곤 낄낄 웃을 때 까지는 정말 괜찮았다. 네가 나온다며 말을 얹는 헤이거에게 나 나오는 영화나 보자, 하고 말하며 영화를 재생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간과한 장면이 있었다. 해리 포터가 소망의 거울 앞에 서는 부분. 꼬마 포터가 투명망토를 벗고 거울 앞에 서자 그 뒤에 다정히 웃고 있는 그의 가족들이 비쳤다. 꼬마 포터는 황급히 뒤를 돌아본다. 소망은 소망일 뿐 이뤄질 리가 없었으므로, 당연히 그 자리에는 자기 자신 뿐이다. 가족들은 죽었고 꼬마 해리는 여전히 고아였다. 오래된 영화화면을 보고 있던 영화 바깥의 해리는 옆 자리에 앉은 얼굴을 살핀다. 옆에 앉은 이가 이 장면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당장 저부터 기분이 가라앉았다. 해리는 옆에 앉은 헤이거를 힐끔 보다가 가벼운 투로 말을 잇는다. 그러나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며 영화 속의 해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 저런 거 앞에 서면 난 휴가 나와서 퍼질러 있는 내가 보일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로 앞에 저런 거울이 주어진다면 해리는 거울을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후회만 하게 될 것이 자명했다. 가족이 다시 돌아온다면, 하는 생각은 영화 속의 해리도, 영화 밖의 해리도 하고 있으리라. 그리고 옆에 앉은 헤이거도 어쩌면 비슷할 터였다. 그래서 해리는 모르는 척 헤이거를 끌어안고 어깨에 뺨을 기댔다. 전해지는 온기에도 불구하고 그 때 전쟁이 나지 않았더라면, 병원이라도 옮겼더라면, 하는 의미 없는 후회들이 쏟아졌다. 후회하는 동안에도 장면은 넘어가고, 영화 끝에서 꼬마 해리는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웃었다. 하지만 해리엇은 웃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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