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준비가 되질 않았나 보다.
말을 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진심이 아닌 말들을 진심인 것처럼 포장해 준비해왔었다. 처음부터 가볍게 하기로 한 연애였잖아, 나 원래 연애 길게 못 하는 거 알잖아…. 내 상상 속의 나는 훨씬 더 연기를 잘했다. 한 번도 너를 사랑했던 적이 없는 사람처럼 서늘한 표정으로 단단하게 말했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그러질 않았다. 거짓말이 서툰 아이 같은 음성이었다. 한 번도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해본 적이 없었는데. 몰래 서리를 하고 거짓말을 했을 때도, 면접을 볼 때도, 심지어 전쟁 중 군인인 척 연기했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나는 꼭 겁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네 표정을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표정일지 보고 싶지 않았다. 상처받은, 내가 사랑하던 갈색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이별을 통보하고 도저히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서 휴가까지 쓴 거였다. 아무렇지도 않기엔 이미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었다.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네가 좋아져서 망설이고 있었다. 후회할 짓 같은 건 만들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는데, 정말로 헤어지고 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죄책감 때문에 헤어지겠다고 결심해놓고 그랬다. 메마른 입술을 겨우 떼곤 감춰뒀던 말을 토해냈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계속했었어. 넌 아내도 있던 사람이잖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는데……. 네가 언젠간 가족들이랑 다시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해놓고 이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근데….”
네 옆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 하고 겨우 진심을 뱉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항상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방황하는 너를 붙잡으려고 연애를 말했지만, 언젠간 네 아내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해리엇 버크? 그런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함께 있고 싶어서 애써 묻어뒀는데, 생사도 모르는 네 아내에게 질투마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같이 했을 시간을 부러워하며 가정하고 싶지 않았다.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조금 숙였다.
“출근한다는 거 거짓말이야. 너랑 헤어지고 로마에 가려고 했어. 나 휴가도 썼다?”
혼자 걷는 로마의 거리는 사랑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때 그 거리를 사랑스럽다고 느꼈던 건 옆에 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테니까. 그 거리에, 쏟아지는 햇볕 아래로 찡그리듯 어렴풋이 웃던 네 얼굴이 있어서였다. 무언가 이야기하던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던 다정함에 집중하느라, 네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발짝 늦게 알아채던 순간들 때문이었다. 나는 함께 이탈리아로 갔을 때 끊은 모든 티켓 위에 네 이름을 써뒀었다. 헤이거 데이비스라고 어느 때보다 애정을 담아 또박또박 적어두었다. 그래서 너 없이 걷는 로마의 거리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글씨를 적어 내릴 때 쏟은 마음이 너무 커서. 다시 한 번, 같이 햇살이 쏟아지던 그 거리를 걷고 싶었다.
“……그런데, 갈 자신이 없네. 후회할 여행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확히는 헤어질 자신이 없는 거였다. 네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티켓을 내밀었다. 오늘 날짜와 다빈치의 이름을 딴 공항 약자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리고는 겨우 네 얼굴을 바라본다. 헤어지자고 해놓고 정말 우스웠지만, 기만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붙잡아줄래, 헤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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