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결혼식장에 있다. 해리엇 버크와 헤이거 데이비스가 오늘 결혼한다.
결혼은, 그러니까 누군가의 옆에 오래도록 머물러있겠다는 어떤 약속 같은 것으로 느껴져서 낯설었다. 어렴풋이 결혼이라는 단어는 평생 내 것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한 사람과 연애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전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연애를 한다면 언제나 나는 떠나는 사람이었고 사실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직업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훌쩍 떠나도 이상하지 않은, 아침에는 미국에 있어도 점심 즈음에는 도착지가 아주 먼 비행기를 타는.
헤이거와도 그런 식으로 끝이 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헤어지더라도 친구로서 남을 거라고는 믿었다. 오랜 고향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어렴풋이 생각도 했었다. 나는 너무 장난스럽고 가벼운 사람이라서 너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너는 심지어 결혼까지 했던 사람이었고 애까지 있었는데. 그런데 네가 파도 앞에 선 모래성처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서, 나보다도 멀리 떠날 것 같아서 붙잡아야 했다. 처음에는 분명 그런 핑계였는데 오히려 네가 나를 잡아두고 있었다. 구속당하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저 정해진 목적지가 생긴 것 같았다. 내가 돌아올 자리가 너라도 되는 것처럼.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괜찮지 않을 것 같게 만든 사람이었다. 붙잡아달라고 말했을 때 티켓을 받아주던 흉터 남은 손이 아직 선했다. 그날 저녁에 레스토랑에서 마셨던 와인도. 눈썹을 늘어뜨리며 순하게 웃던 얼굴이 간지럽고 조금 낯설었는데, 어렴풋이 옛날 언젠가를 생각나게 해서 좋았다. 자연스레 나오는 어린 시절 얘기, 애정과 걱정 섞인 잔소리 같은 것들. 유년부터 지금까지를 한 번에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래도록 누군가의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청혼을 받아주었다. 만약 헤이거 데이비스가 청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청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손에 든 장미다발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청혼을 하던 얼굴은 사진으로 하나 남겨놓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꽃다발을 받아들 때 새어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 우리 결혼할까? 결혼하자. 우리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짧게 입 맞췄던 것도 마냥 행복했다.
나는 이따금 불안했었다. 어릴 때부터 너무 달라서 우리는 같이 갈 수 없는 게 아닌가 하고. 끝이 나버리지 않을까 하고. 그러나 우리는 모양은 다르지만 홈이 맞는 퍼즐조각처럼 맞아들어갔고, 지금 여기 이 자리에 있다. 나는 조금 낯선 웨딩드레스 자락을 매만지다가 네 손을 잡았다. 언젠가 정장을 입고 결혼식장에 한 번 섰었을 헤이거 데이비스는 나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숨을 삼키다 손을 맞잡아주었다. 꽃다발을 물고 꼬리를 치며 뛰어다니는 브루노와, 그 전쟁 속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지나서, 레드카펫을 밟고 단상 앞에 선다. 고개를 돌리자 드물게 웃음짓는 벤틀리 영감님과 눈이 마주친다. 어색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을 뒤로하고, 단상 위에서 네가 나를 들어올려 안았다. 스테인드 글라스의 이름 모를 그림이 우리를 내려다본다. 환하게 웃는 얼굴 위로 색색으로 갈라진 환한 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빛을 뒤집어 쓴 얼굴위로 입 맞추며 생각한다.
우리는 옛이야기처럼, 아마 오래오래 행복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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