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미를 처음 발견한 건 밤새 열심히 내린 눈이 쌓여 빛나던 어느 날 오후였다. 제임스와 시리우스가 마구잡이로 눈을 뭉쳐 던지는 걸 피해 슬슬 뒷걸음질 치다가 등이 벽에 살짝 부딪혔다. 목덜미에 따끔한 감각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눈에 잠긴 빨간 장미가 있었다. 길게 벽을 타고 올라있었다. 가시가 벽에 파고든걸까, 아니면 스며든걸까 하고 리무스는 생각했지만 뒤 따라 달려온 시리우스와 제임스 덕에 생각은 깊게 뻗어가지 못했다. 시리우스가 장미와 리무스, 정확히는 리무스의 '목덜미'를 유심히 보다가 제임스의 목도리를 뺏었다. 손을 뻗어 리무스의 뒷목을 매만지다가 상처났어, 하곤 목도리를 칭칭 감아주었다. 그제서야 리무스 루핀은 저가 다쳤다는 걸 깨달았다. 찬바람에 닿은 살이 빨갛게 얼어있었던 탓이었다.
그날 저녁시간에 시리우스는 그렇게 말했다. 리무스, 어떤 꽃은 피를 먹고 자란대.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리무스는 반사적으로 생채기가 난 제 목덜미를 매만졌다. 그게 무슨 얘기야? 시리우스가 하릴없이 닭다리만 포크로 찌르다가 답했다. 특히 붉은 꽃은, 붉은 장미는. 가시로 다가오는 물체에게 상처를 입혀서 피를 뺏는대. 그 다음에. 그 얘기를 들은 피터가 몸을 작게 떨었다. 포크를 움직일 때 닿은 팔꿈치로 그 떨림이 전해져왔다. 리무스는 제 뒷목을 꾹꾹 눌렀다. 그래서? 낮게 웅얼인 말은 끝이 떨리고 있었다. 제임스가 피터와 시리우스와 리무스를 번갈아보다가 답잖게 뭔 이상한 소리를 하냐고 시리우스의 등을 소리나게 쳤다. 그래서 그들은 뒷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수업이 하나 비었다. 리무스 루핀은 혼자였다. 시리우스와 제임스와 피터, 셋 모두와 따로 듣는 수업이었다. 리무스는 뒷목에 생긴 상처를 폼프리 부인에게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뒷목을 매만지는 버릇이 생겨서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계속 덧나고 덧났다. 리무스는 아직 녹지 않은 눈길을 걸었다. 깨끗한 눈밭을 골라 걸었다. 걸어온 자리엔 발자국이 길게 나있었다. 한참을 같은 길만 뱅뱅 돌다가 호그와트 성벽을 따라 걸었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돌담 사이사이 눈이 서려있었다. 리무스는 그것을 손 끝으로 건드리며 걸었다.
그리고 리무스는 다시금 장미를 보았다. 장미는 싱싱했다. 붉은 꽃잎이 하얀 눈들과 대비되어 더 빨갛게 보였다. 붉은 장미는 상처를 입혀서 피를 뺏는대, 하던 시리우스의 말이 생각났다. 장미가 정말로 피를 뺏는 걸까. 장미가 뺏은 피는 어디로 갈까. 리무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장미 가지를 매만졌다. 가시 끝이 위태로웠다. 리무스는 부러 손톱으로 장미 가시를 툭툭 건드렸다. 어떤 여자애가 '장미는 꽃들의 여왕' 이라고 했었지. 피는 시들어가는 꽃들에게 갈련지도 몰랐다. 리무스는 검지손끝을 장미 가시에 대고 꾹 눌렀다. 꽃잎 만큼이나 붉은 피가 맺혀나왔다.
“무니!”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무스는 시선을 위로 했다. 시리우스가 창가에 기대있었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뒤에서 교수님의 목소리도 함께 울렸다. 리무스는 제 손을 뒤로 숨기며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하고 있었어, 하고 소리쳤다. 시리우스는 리무스의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6/28
현대 AU
시리우스 블랙이 제임스 포터를 살해했다고, 신문에선 그렇게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시리우스의 마지막 모습은 아침 뉴스에 나온 흉악 범죄자 ‘시리우스 블랙’ 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계란 프라이를 만들고 있었다. 반쯤 익은 계란을 반쯤 탄 빵으로 옮기다가 계란 노른자를 터뜨려서 노랗고 끈적한 물이 발등으로 떨어졌다. 뜨거웠다. 그런데도 딱히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정말 시리우스가 제임스를 찔렀다면 이렇게 피가 흘러내렸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토스트를 그냥 입에 쑤셔 넣었다. 뜨거운 빵이, 터진 계란 노른자가 입천장에 닿아 얼얼했다. 쓰리고 아렸다.
제임스 포터는 시리우스 블랙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 나는 제임스의 배에 이쑤시개를 꼽는 시리우스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냥 둘이 스케일 큰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언제나처럼. 둘은 학교 다닐 때도 크고 작은 장난을 치곤했었다. 놀라거나 당황한 내 얼굴을 보고 배를 잡고 낄낄 웃다가 어때 무니, 재밌었어? 하고 물으며 어깨를 툭 치거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이것들이 다 깜짝 이벤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전혀 현실감이 없어서. 휴대폰을 들여다봐도 둘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제임스의 장례식에 갔을 때서야 그것이 정말이라는 걸 실감했다. 제임스는 배를 세 번 찔려 죽었다. 칼은 시리우스의 것이었고 거기에는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고 했다. 혹시 시리우스에게 온 연락 같은 건 없느냐고 경찰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꼭 어딘가에 제임스가 살아있을 것만 같았다.
제임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던 걸지도 모른다. 시리우스와 내가 있고, 그 사이에서 우리 어깨에 팔을 두르던 제임스. 장난스럽게 웃던. 나는 시리우스와 연애하면서도 그 사이에 있는 제임스를 느껴야했다. 그것이 싫지 않았다. 그는 모래 사이에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멍하니 흰 국화의 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경찰이 제임스가 입었다던 바바리코트를 보여주었다. 주머니 안에 목걸이가 들어있었다고 했다. 목걸이 줄만 남아있었다고 했다. 뭔가 아는 게 있냐고 묻는 경찰의 말을 한귀로 흘러들으며 바바리코트의 끝자락을 매만졌다. 바랬지만 옅게 제임스의 체취가 났다.
그 순간 내가 느낀 것은 안도도 편안함도 그리움도 무엇도 아니었다. 나는 제임스, 하고 웅얼거렸다. 경찰이 안쓰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시리우스, 하고는 속으로만 읊어야 했다. 지금 무엇보다 보고 싶은 건 시리우스였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사실 이런 일이 있었어. 그런 말들은 바라지도 않았다.
네 손에 입을 맞추면 옅게 밴 흑연과 물감 냄새 그리고 종이 향이 났어. 네 냄새였지. 졸고 있는 네 옆에 다가가 앉을 때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때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코끝으로 스며들던. 그림을 그리는 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파레트를 들고 있던 팔을 붙잡고, 구멍 새로 삐져나온 손끝에 입 맞출 수 있던 때가 좋았는데. 이제 눈을 감고 열을 세어도 그때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미소 지었는지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며 찡그렸다가 푸스스 웃음 지었는지. 너는 참 봄 같았어. 많이 좋아했는데.
***
꽃은 한 번에 폈다가 한 번에 져버렸다. 정신없이 일에 시달리다 보니 목련은 언제 입을 벌렸고 철쭉은 언제 고갤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더 이상 꽃을 똑바로 보지 않게 되었다. 괜히 어지러워져서 눈을 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이 지나고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계절의 흐름을 사람들의 옷차림과 피부에 닿는 온도로 잡아내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햇빛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회사주가 여름 생각은 않고 난방 효과를 높이겠다며 건물 한쪽 벽면을 전부 유리 창문으로 바꾸는 바람에 우리 회사 사람들은 정말로 햇빛에 찔려 영혼을 토하며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전력을 아끼자느니 어쩌자니 하는 정책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 놓고 틀수도 없었다. 선풍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다. 에어컨을 끄면 실내 온도가 과장 좀 보태서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제 6월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말하기엔 시기상조지. 모두가 여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어쩌면 여름은 이미 우리 앞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열사병으로 노인 하나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어제 저녁에 짤막하게 나왔으니까. 정정하겠다. 여름은 봄을 밀치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예고 없이 찾아와서 햇빛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아마도 예고 없이 사라질 터였다.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남기고 간 부스러기들만 붙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참아야 할 일이 있거나 떠오르지 않는 게 있을 때 눈을 감고 열을 세는 버릇이라던가. 화를 못 참아 종종 사고를 쳤던 내게 그 애가 알려줬던 거였다. 손을 뻗어 눈을 감겨주었다.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눈을 감고 열을 세 봐. 숫자를 다 세고 눈을 뜨자마자 그 애는 내게 입 맞췄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처음으로 입 맞췄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목 끝이 화해질 거 같아서.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이나 떠올리며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제 나는 어른이었고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입 맞추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같은 여자애한테. 성적 지향이 어땠든 이 나이엔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남자 만나서 결혼이나 하는 게 훨씬 편한 거잖아.
에어컨도 안 나오는 우울한 오후였다. 모두의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니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어느 독거노인이 선풍기를 틀고 자다가 질식했다는 조그마한 뉴스가 떠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은 노인이 된 것 같았다. 나도 질식해버릴 것 같아서 뉴스창도 선풍기도 꺼버렸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누가 죽었건 어떻게 됐건.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었다.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에 치여 사는데다가 커피중독.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이렇다 할 취미 생활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굳이 애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연인은 그 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개팅도 번번히 얼굴만 비추고 나왔다. 이따금 주말에 혼자 디저트 가게나 카페에 들러서 무언가를 사먹는 게 내 인생의 낙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사무실 옆에 빵집 생겼더라.”
선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빵집이라면 어차피 그 옆에 있는 프렌차이즈점 때문에 금방 망할 텐데. 우리나라에서 동네 빵집이 잘되긴 어지간히 힘드니까.
“나중에 한번 가볼게요.”
빵집이라면 식빵이나, 소보루 빵이나, 팥빵 같은 게 진열되어 있겠지. 갓 구운 빵 냄새가 날까. 아마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터였다. 진득히 콧속으로 들러붙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겠지. 그렇다 해도 빵이 어지간히 맛있지 않으면 카페랑 프렌차이즈점에 밀려서 수면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아무래도 카페보단 음료수나 서비스 같은 게 덜 되어있지 않나.
“어, 거기요? 거기 알반지 점장인지 완전 예뻐요.”
남직원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맨날 얼굴도장 찍잖아요, 하고 웃는 게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사실 나는 거기서 일하는 여자가 얼마나 예쁘게 생겼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쁘다니까 괜히 궁금해서.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긴 생머리에 웃을 때 보이는 가지런한 이가 예쁘고, 보조개가 들어가고,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애를 떠올렸다.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갔었다. 그림 그릴 때 두르는 앞치마가 잘 어울렸었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길 때마다 보이는 둥근귀가 참 예뻤었다.
“그리고요, 저번에 보니까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커피를 붓 끝에 찍어서 도화지에 웬 여자를 그리고 있더라고요.”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하고 남직원이 덧붙여 말했다. 정말로 그 애 생각이 났다. 그래서, 혹시나, 혹시나 해서.
내가 다시 한 번 네 손에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어떤 향이 날까. 여전히 흑연냄새와 물감냄새 그리고 종이 향이 날까. 아니면 밀가루와 이스트와 녹은 설탕냄새, 그리고 커피향이 날까. 너는 커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으니까. 봄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니까 그게 네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빵집 문을 열었을 때 네가 햇볕 드는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넌 나무 아래서 이젤을 펴놓고 나뭇잎 새로 햇볕을 맞으면서 연필을 놀리곤 했으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만약 그 자리에 네가 있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소를 지을까 아니면 놀란 표정으로 날 봐줄까. 누군지 기억 못하고 있으면 어쩌지. 다시 만나는 너도 봄 같을까. 많이 좋아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