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무스가 고개를 들었다. 한 손에는 버터맥주잔을, 다른 손에는 책을 든 채였다. 제임스는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피터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얼핏 들으면 주문 같은 무의미한 단어들을 중얼거렸다. 리무스는 그 둘을 훑어보다가 제 앞에 선 시리우스를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얼굴 색깔도 표정도 걸음걸이도 취한사람의 그것과는 달라서 이질적이었다. 시리우스가 리무스쪽으로 느릿하게 걸어오다가 우물우물 입을 열었다. 리무스, 무니. 그때서야 리무스는 시리우스가 취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리우스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더니 리무스의 양 손목을 그러쥐었다. 그 순간 술 냄새가 확 끼쳐 올라서, 리무스는 얼굴을 구겼다.
“뭐하는 거야, 시리우스?”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카펫이 가볍게 패였다. <늑대인간의 역사>. 시리우스가 책 표지를 꾹 밟았다.
“넌 여기까지 와서 이런 거나 읽고 싶어?”
“난 안 마실 거라고 말했잖아, 시리우스.”
옅게 풀린 까만 눈이 잠깐 리무스에게 닿았다가 맥주잔에 닿았다. 손목이 끌어당겨졌다. 잔을 쥐고 있던 손이 시리우스의 입가로 향했다. 황금빛 액체가 시리우스의 목을 타고 넘어갔다. 너 취했어. 올라가서 자. 리무스가 한숨을 뱉었다. 일어나려는 리무스를 시리우스가 저지했다. 아씨오 버터맥주, 아씨오 잔. 시리우스가 속삭였다. 버터맥주병과 위스키가 담긴 잔이 비틀비틀 날아왔다.
“버터맥주라도 더 마셔. 건배하자.”
“…좋아. 대신 내가 이거 다 마시고 나면 넌 올라가 자야 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리우스의 손끝에서, 잔 밖으로 흐를 듯 말듯 파란 액체가 출렁거렸다. 리무스는 버터맥주를 잔에 따랐다. 거품이 잔 가득히 차올라 넘쳤다.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리무스, 이거 알아? 거품은 눈을 감고 열을 세면 없어지는 거야.”
술 취한 사람 특유의 헛소리라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위는 맞춰줘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올라왔다. 리무스는 버터맥주 거품이 터지는 걸 보다가 눈을 감았다. 느릿하게 수를 세면서, 하나, 둘, 셋, …열. 시리우스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차있었다. 무니, 하고 시리우스가 말했다. 잔을 쭉 들이켜 내용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너 많이 취했어, 하고 리무스가 입을 여는 순간 넥타이가 끌어당겨졌다. 목이 졸렸다. 입술이 맞닿으면서 위스키가 목 끝으로 넘어갔다. 미끄러지려는 잔을 시리우스가 뺏어들고는 혀를 얽어왔다. 리무스가 이를 세웠다. 어깨를 밀쳐냈다. 시리우스가 비틀거리며 떨어졌다. 내가 안 마신다고, 했잖아. 한참 쿨럭 거리던 리무스가 시리우스를 노려보았다. 시리우스가 제 입가를 훔치며 씩 웃었다. 어딘가 몽롱한 웃음이었다. 봐, 거품이 꺼졌잖아.
잔의 거품이 가라앉아있었다. 화낼 힘도 없어서 리무스도 피식 웃었다.
***
리무스, 오늘 저녁 맛있다. 무니, 이따 커피 타줄게. 리무스, 텔레비전에서 영화해. 무니, 리무스, 무니.
시리우스는 잠시라도 리무스를 부르지 않으면 증발해 없어져 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리무스는 대답 없이 포크를 들어 토마토를 찔렀다. 샐러드 접시가 가볍게 달그락거렸고 붉은 액체와 녹색 끈적한 토마토의 내장이 허연 양상추 위로 쏟아져 내렸다. 느릿하게 그것을 씹어내는 리무스는 글쎄, 플로버웜이라도 씹는 사람 같았다. 시리우스가 한 접시를 비워내는 동안 샐러드는 반도 줄지 않았다. 리무스, 하고 시리우스가 다시 부르자 리무스는 소리 나게 포크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눈이 짧은 순간 마주쳤다. 먼저 눈을 피하는 건 항상 리무스였다.
“그만 불러. 어디 안 도망가니까. …나 씻고 올게.”
“너 감기 걸려.”
“안 걸려.”
리무스는 욕조에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거품을 풀어놓은 욕조 속에서 물이 다 식을 때 까지, 거품이 가라앉을 때 까지 앉아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시리우스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습한 공기가 식어 차가워져 있었다. 훑어본 리무스의 몸이 기억하던 것 보다 말라있었다. 영화 시작할 시간 다 됐어, 네가 예전에 보고 싶다고 했던 머글 영화. 리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리우스가 리무스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축축하고 잔뜩 불어 쪼그라든 손이었다. 리무스가 손을 힘주어 빼려고 했다. 시리우스는 손을 놓지 않았다. 한숨이 욕실 너머로 퍼졌다. 리무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물 위만 보았다.
“그거 기억해? 네가 그랬잖아.”
거품은 눈을 감고 열을 세면 없어지는 거라고. 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고 숫자를 세도 거품이 가라앉지 않았어. 리무스가 중얼거렸다. 그건 예전에 내가 너한테 키스하려고 했던 얘기였는데, 하며 시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손을 놓아주었다. 얼른 씻고 나와. 커피 타놓고 기다리고 있을 게.
“시리우스.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뒤돌아 나가려는 시리우스에게 리무스가 그렇게 말했다. 이번엔 시리우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대신 주먹만 꾹 쥐었다.
모두 제임스 포터가 죽은 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를 잃어버렸고 시리우스 블랙은 누명을 썼으며 리무스 루핀은 마법을 잃어버렸다. 둘은 바깥으로 도망쳐 나왔다. 마법이 없는 세상으로. 머글들과 함께. 시리우스는 답잖게 말이 늘었고 리무스는 죽은 사람처럼,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
커피는 아직도 따뜻했다. 마법이라도 쓴 거냐고 물었을 때 시리우스는 그냥 웃어보였다. 둘은 말없이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둘은 자주 영화를 보곤 했다. 온통 흑백이었다. 머글들도 제법이네, 하고 시리우스가 중얼거렸다. 브라운관은 이따금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배우 얼굴 위로 까만 선이 지나가곤 했다. 리무스는 커피 잔을 조심스레 잡아 흔들거렸다. 갈색 액체가 출렁거렸다. 시리우스는 영화가 아니라 리무스를 보았다. 리무스, 손 데여. 리무스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배가 부딪혀 쾅 하는 소리가 났다. 순간 리무스가 잔을 떨어뜨렸다. 쨍 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났다. 리무스는 영화 속 사람들처럼 비명을 지르는 대신 허리를 숙여 깨진 조각들을 주웠다. 조각들은 뜨거웠고 날카로웠다. 내가 할게, 하고 시리우스가 손을 뻗던 순간, 아, 하는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리무스의 손끝에서 피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