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도 이영싫 온리전 개인지 웹공개합니다.
햇빛자국이 사라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렴. 누군가가 그렇게 속삭였다. 왜요? 하고 입 밖으로 빠져나가는 목소리는 마냥 앳되어서 낯설었다. 안 그러면 박쥐한테 목덜미를 물어 뜯길지도 몰라. 박쥐는 애들 피를 좋아한단다. 애들 피는 달거든.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서려 있었고 그것은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내 옆에는 괜찮아, 하고 손을 끌어다 잡아주며 달래던 형이 있었다.
내 쌍둥이 형이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 기억에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내 쌍둥이 형.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던 잃어버린 우리 형. 모두가 환상이라고 말했던, 영원히 함께일 것 같았던 형.
형, 어디 있어?
우리는 함께 성년을 맞이하지 못했다.
***
성년을 맞이하고 나서 제일 처음으로 했던 일은 해가 진 후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까맣게 변해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걷고 있는데 웬 여자가 팔을 붙잡았다. 이 근방에서 가면무도회를 해요. 나는 가겠노라고, 다만 안에서 쓸 가면이 없다고 했다. 여자가 어디선가 가면을 꺼내 건네었다. 눈만 가리는 까만 가면이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무도회는 지루했다. 콧잔등이 간지러웠다. 사람들은 깃털이나 보석으로 장식한 가면을 덮어쓰고는 둥글게 돌며 춤추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들이 이 행위를 즐거워하는지 지루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나로서는 그랬다. 나는 이것보다 지루한 행위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무도회장에선 이름 모를 왈츠를 이름 모를 악단이 연주했다. 나는 음악에 무지했으므로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노래는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했다. 사람들은 그것에 맞춰 움직였다. 나도 그랬다. 사람들의 손이 손으로 옮겨갔다. 부드럽고 조그마한 손과 거칠고 커다란 손이 서로 입 맞추곤 했다.
밤 무도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늦은 밤에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큰형은 지나칠 정도로 나를 보호했다. 아니, 때릴 건 다 때렸고 시킬 것도 다 시켰으니 보호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저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을 뿐이다. 밤의 나는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다. 내가 무엇으로 애원해도 안 되었다. 큰형은 커튼을 치곤 문을 걸어 잠갔다. 미간에 간 주름을 꾹꾹 누르며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안 돼, 못 나가, 했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도 마찬가지였다. 과제가 있어. 학교에서 뭔가 연구해 오랬어. 어딜 간대. 당일치기가 아니라 1박 2일로. 그러니까 나가게 해줘. 그러면 큰형은 넌 아직 성년이 아니니까 해 지면 밖에 못 나가, 하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다.
세 바퀴쯤 돌고 돌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남녀가 손을 꼭 맞잡거나, 혹은 남자의 손이 여자의 허리에 닿은 채로 사라졌다. 그들은 어딘가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무얼 할지 빤히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곁눈질했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허리춤에 날개가 달린 남자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대형을 이탈했다. 남자는 하얀 머리칼에 하얀 날개를 갖고 있어서 꼭 우리 일족 같았다. 그렇지만 우리 일족은 그런 행위를 잘 하지 않았다. 굳이 종족번식을 할 필요도 없었고 행위에 희열이나 쾌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남자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운 체형이며 키를 갖고 있었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일족이라면 몇 되지 않아서 기억 했을텐데, 최근에 저런 뒤통수는 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낯익은 듯한.
어디서 봤더라? 조금 오래 전에, 예전에 본 것 같은데. 아니, 내가 그때 본 우리 일족이면 아직도 저렇게 작을 리가 없잖아.
발은 내 멋대로 움직여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나갔다. 짝 하나 없이 밖으로 나가는 나를 사람들은 힐끔거렸다. 방금 대형을 이탈한 남녀의 뒤를 쫓는 나를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복도 구석엔 커다란 기둥이 있었다. 사선으로 선 그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다만 언뜻 하얀 머리카락과 날개 죽지가 보였을 뿐이었다. 여자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딘가 잔뜩 취한 듯한 음성이었다. 환희와 기쁨, 극도의 흥분이 담긴 목소리. 기둥 옆으로 남자가 쓰고 있던 까만 가면이 툭 떨어졌다. 주변은 쥐죽은 듯 조용해서 여자가 으응, 하는 소리까지 언뜻 들렸다.
둘이 무얼 하든 상관은 없다.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싸한 느낌은, 기분은, 내가 그 자리에서 그 장면을 봐야할 것만 같다는 기묘한 의무감을 불러일으켰다. 기둥뒤에 숨어서 이따금 날개죽지가 움직이는 걸 보고 있자니 글쎄.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싶어졌다.
아, 하고 짧은 외마디소리가 들렸다. 여자였다. 흥분감에 가득 차 내는 소리 같기도 했고 아니면 마지막을 알리는 비명소리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발이 멋대로 다가섰다. 그리고 마침내 기둥 뒤에 섰을 때 마주친 것은.
“…형.”
입가에 핏자국이 그득한 형이었다. 여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에서 하나도 자라지 않은 내 쌍둥이 형이었다. 형은 축 늘어져 흰자를 뒤집어 까내린 여자를 톡 밀치고 걸어왔다. 여자가 툭 쓰러졌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본능적인 공포.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벽이 등에 닿았다.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호?”
그제야 발이 떨어졌다. 다가서는 형을 밀치고 달음박질 쳤다. 저건 형이 아닐거야. 내가 질 나쁜 환상을 보고 있는 거다. 꿈일 거였다.
***
숨이 턱 막혔다. 목이 화끈거렸다. 누군가가 목젖을 잡고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눈이 따가웠다. 눈을 감아 누른다. 잔상이 남는다. 입가가 온통 피범벅이던 형의 잔상이. 형, 우리 형, 일호 형.
형은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형이 없어졌던 날, 잠에서 깨서 형은 어디있느냐고 물었을 때, 큰형은 내게 형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했다. 아니, 일호 형. 내 쌍둥이 형. 어디 있어? 너한테 쌍둥이 형제같은 건 없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넌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다고 했다. 큰형은 내게 꿈에서 덜 깼냐고 묻기도 했다. 나는 안정을 취해야한다는 명목으로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학교도 그랬다. 자퇴서를 쓰면서 큰형은 네가 굳이 학교를 졸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그랬다. 집에서 공부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형이 처음부터 없었다기엔 미심쩍은 면이 많았다. 나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어디도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저택을 뒤져도 형의 흔적들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형의 방문도 잠겨있었다. 큰형에게 물으니 그 방은 원래 오래 전 부터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다고 답했다. 으스스해서 잠거 뒀다고. 미심쩍었지만, 나는 천천히 형이 꿈이었다고, 환상이었다고 믿게 되었다.
정말 그런 줄로 알았는데, 거짓말이었어.
“잘 다녀왔냐?”
큰형의 손엔 잔이 들려있었다. 와인이 잔 끝에서 찰랑거렸다. 자줏빛이었다. 어쩌면 핏빛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목 끝이 간지러웠다. 토할 것 같아서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다. 어깨를 밀치고 지나갔다. 와인잔이 크게 흔들리더니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허, 참, 하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부러 발을 구르며 계단을 올랐다.
“네가 애야?”
“내가 애라서 나한테 거짓말 했어?”
“무슨 소리야.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계단 끝에 서서 큰형을 내려다보았다. 미간에 간 주름이 깊어보였다. 시선이 맞닿았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나 일호형 봤어.
뭔가 째지는 소리가 났다. 깨지는 소리가 났다. 대리석 바닥에 흐른 와인이 피 같았다. 왜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그리고 침묵, 또 침묵. 큰형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느릿하게 입을 떼었다. 입술이 떨어졌다.
“네가 뭘 본 지는 모르겠지만. …네 형은 죽었어.”
그럼 내가 본 건 뭐란 말인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이호, 하고 나지막이 부르는 소리가 나서 귀를 틀어막았다. 침대에 누웠다. 몸에 닿는 이불은 지나치게 푹신하고 포근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도 같았다. 그냥 눈이 감겼다. …눈을 감으면 꿈을 꾸겠지.
***
내가 기억하는 형은 망나니였다. 귀에 피어싱도 몇 개나 있었고 담배도 폈다. 무단조퇴는 기본이고 교복도 규정대로 입지 않았다. 단추도 두어개 풀어 입곤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조끼가 없는 건 당연했다. 학교에서 큰형한테 연락이 간 이후로는 넥타이만 걸쳤는데, 그마저도 느슨했다. 그래도 여자는 안 건드렸고, 거슬리면 폭력을 행사했지만 상대가 피범벅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최소한의 선은 지켰다.
형은 타고난 반항아였다. 언제나 규칙을 어기곤 했다. 큰형은 언제나 말하고 또 말했다. 해 지면 위험하니까 나가지 마라. 학교 끝나면 바로 집에 들어와라. 절대 사람 없는 데로는 지나다니지 말아라. 우리에게 있어 가장 절대적인 선이었다. 아직 형이 어기지 않은 것은 그것밖에 없었다. 학교 교칙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형이 그랬다.
“학교 끝나고 어디 좀 나가자. 그, 강가쪽. 다리 밑. 해지면.”
“큰형이 가지 말랬잖아.”
“밤에 볼만 하다던데.”
일호형은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틀까지 깨부수려는 거였다. 우리는 분명 죽지 않는다. 다치지 않는다.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거라는 것이었다.
이건 위험해.
느낌이라는 게 있었다.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선배, 어디 가요?”
“백모래야.”
“네?”
우리는 강가에 갈 거야. 아이의 손등이며 손가락새를 한 번 쓸어내린 것은 그 직감 때문이었다. 꼭 무슨일이 날 것 같아서. 혹시나 일이 생기면 알릴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해서.
우리는 강을 따라 걸었다. 해가 진 거리는 반짝여서 예뻤다. 햇빛자국이 남지 않은 자리엔 달빛자국이, 불빛들이 떠다녔다. 그날 형은 해 진 그 거리처럼 마냥 빛나보였다. 나는 형의 옆얼굴만 힐끔거렸다. 다문 입술이며 아래로 내리깐 눈이 나와 지나치게 닮아있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닮아있지 않았다.
나는 형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옷자락이 스치면서 몸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넥타이가 덜렁이는 게 느껴졌다. 누군가 옆을 지나가는 것도 몰랐다. 이렇게 가까이 지나가는 것도 몰랐다. 남자가 넌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고 말했다. 무어라 말하려는 데 형이 빨랐다. 그러는 너는 피할 눈이 없어서 내 동생이랑 부딪혔냐고.
시비가 붙었다. 남자는 사람 여럿을 데리고 왔다. 형은 익숙하게 주먹질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위였다. 입술이 터지고 손등에 피가 묻었다. 우리는 다치지 않는다. 상처가 나면 그 자리에서 낫는다. 남자들은 우리를 괴물보듯 쳐다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형은 끈질기네, 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사실 그 장면들이 희미했다.
“형.”
그 싸움에서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무언가 으스러지고 빠개지는 소리와 형의 앓음이었다. 언젠가 잠깐 키웠던 새끼 강아지가 죽기 직전에 내던 소리. 그런 조그맣고 가는 숨소리. 내 앞에 쭈그려 앉아 한 손으론 배를 틀어막고 입을 틀어막고는, 입새로 피를 떨어뜨리던 형. 얼굴을 찌푸리며 무어라 입을 벌리려던 형. 그리고 뒷통수에 닿던 둔탁한 손길. 흐릿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얼굴. 형과 어떤 남자. …어딘가 익숙한.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
탕, 하는 소리가 났다. 유리 긁히는 소리가 거슬렸다. 나뭇가지가 부딪히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눈을 떴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까만 밤이라 더욱 그럴 거였다. 커튼이 끝까지 쳐져있어서 희미한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창문이 가볍게 흔들렸다. 커튼도 창문따라 흔들거렸다.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시금 탕, 하는 소리가 났다.
“바람 엄청 부네.”
말 마치기가 무섭게 똑똑, 똑똑똑. 꼭 누군가 노크하는 것 같이. 여기는 2층이었다. 2층이라고는 해도 층과 층 사이가 많이 벌어져 있어서 지붕을 타고 올라오기는 무리였다.
“이호.”
그런데 형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천 쪼가리 치우고 창문 열어봐.”
홀린 듯 커튼을 젖히자 형이 보였다. 형의 목덜미가 보였다. 빨간 흉터 두 개가 보였다. 꼭 누군가에게 물린 것 같은.
죽은 나뭇잎들과 칼바람과 형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오랜만이네.”
형의 시간은 그 날에서 멈춰버린 것 같았다. 전혀 자라지 않은 키, 앳된 티가 남은 얼굴. 어딘가 어린 듯한 목소리. 느슨하게 맨 넥타이마저 그대로였다. 셔츠를 입을 때 목 맨 윗부분 단추를 풀어 입는 것이며 소매를 살짝 접어올린 것까지 변한 게 없었다. 그래서 이질감이 들었다. 아니, 아니었다. 형도 변해있었다. 태어나서 햇빛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 끝이 말려 올라가는 붉은 입술과 파란 눈에 섞인 붉은 빛이 다른 사람 같기도 했다. 형은 전체적으로 낯설었다. 내가 알았던 내 쌍둥이 형제가 아닌 것 같았다.
“…형, 정말 형이야?”
그 동안 어디 있었어. 왜 하나도 안자란 거야. 왜 나를 찾아오지 않았어? 왜? 그보다 형은 누구야? 형 뭐야? 물음들이 머릿속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것들은 가득 증식해 그 어떤 것도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뜻 모를, 의미 없는 단어들이 대신 흘렀다. 마침내 뭐야, 하는 말만 겨우 입에서 떨어져 나갔다. 입술이 말랐다. 눈이 마주쳤다. 마주한 것은 모호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나는 그 자리에 뿌리박힌 듯 움직이지 못했고 형은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걸어왔다. 손목이 가볍게 잡혀 올랐다. 살에 닿는 것이 부드러운 얼음 같았다. 그것은 형의 손이었다. 뭐 하는 거야, 하는 물음과 동시에 손끝이 무언가 말캉한 것에 닿았다. 형의 입술이었다. 그것이 느릿하게 벌어졌다. 더 깊은 곳으로 손끝이 닿는다. 치열을 훑는다. 깨지기 쉽고 망가지기 쉬운 것을 건드릴 때처럼 힘을 풀었다. 이끄는 대로 이끌리게 내버려두었다.
“…아.”
날카로운 것이 손끝을 긁고 지나갔다. 송곳니였다.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피가 맺혔다가 이내 사라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축축한 것이 손가락을 휘감았다. 나는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제야 손목을 가볍게 비틀어 빼냈다. 형이 스치고 간 자리에는 길게 은빛 자국이 남아있었다. 다시금 시선이 맞닿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형이었다.
“난 뱀파이어야.”
붉은 빛 섞인 파란 눈이 선명했다.
형이 침대위에 걸터앉아도 시트는 구겨지지 않았다. 그리 단정한 자세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형은 곧잘 시트를 어지럽히곤 했다. 분명 깨끗하게 정돈된 자리였음에도 형이 지나가면 파도모양으로 시트가 일그러지곤 했다. 나는 잘 지내나 궁금해서 왔다는 형의 말보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한 배려인가, 아니면 그저 물체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침대에 걸터앉는 것이 익숙해진 탓일까.
“말에 집중 안하지?”
“어? 어…….”
“내 물건들 가지러 왔어.”
뱀파이어가 되기 전에 쓰던 것들을 도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혹시 네가 쓰고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하고 말하는 게 낯설었다. 내가 알던 형은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이거 빌린다? 하고 휙 가져가곤 했지. 나는 말을 고르고 고르다가,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그랬다. 형이 쓰던 건 큰형이 다 버렸을 거야. 옆방 문 열려 있길래 봤더니 아무것도 안 남아있더라. 처음부터 빈방이었던 것처럼.
형은 한참 말이 없었다. 스며든 달빛은 형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여주지 않았다. 시계가 몇 번이고 몇 십번이고 째깍이고 나서야 형은 일어섰다. 달빛이 일그러진 입 꼬리를 보여주었다. 나는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뒷말은 안 붙이는 게 나을 뻔했다고, 뒤 늦게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 갈게. 잘 지내.”
“가지 마.”
“가야지, 해 뜨기 전에.”
창 쪽으로 향하는 팔을 꽉 잡아챘다. 차가운 손을 잡아 올려 얼굴을 묻었다. 형,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어. 가지 마. 말은 내 의지대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타인이 내 입을 빌어 말하는 것 같았다. 형은 웃었다.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내일 또 올게.
다음 날 형은 정말로 나를 찾아왔다. 햇빛자국이 하나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똑똑, 똑똑똑. 노크 소리는 어제와 같았다. 문을 두드리는 창밖의 형은 질량이 없는 것처럼 떠있었다. 안녕. 손을 흔드는 게 현실성 없었다. 형광등을 켜두면 큰형이 올라올까봐 대신 둔 촛불을 불어 끄는 것도 그랬다. 허리를 살짝 굽히고, 고개를 숙여서 입술을 모으곤 숨을 뱉는 것이었다. 연기 자국이 탄내음을 흘리며 올라갔다. 코를 틀어막았다. 불은 왜 꺼? 창백해 보이는 게 싫어서. 형은 어딘가 소년처럼 웃었고 나는 나 혼자서만 어른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우리는 어색하게 둘만 놓인 삼촌과 조카 같았다. 한참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고 나는 무언가 말을 해야만 했다.
“형. 형은 죽은 거야?”
대답 대신 손목에 닿는 손가락이 차가웠다. 형의 가슴팍에 얹힌 손 위로는 아무 온기도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어있었다. 부패되지 않은 시체 같았다. 그날 형은 죽었구나. 심장이 멈췄구나. 괜히 가슴께가 아렸다. 이 말은 안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출렁거렸다. 말없이 말하는 형은 그것대로 슬퍼져서 싫었다. 미안해. 그냥 으쓱하고는 사실인데, 하는 게 괜히 미웠다.
형은 죽은 것도 나름대로는 지낼 만 하다고 말했다. 더는 피곤하지 않다고 했다. 무언가를 배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저 누군가의 피를 빨면 뭐든 알게 된다고 했다. 나는 이 대목에서 얼굴을 찌푸려야 했다. 입가에 피가 그득했던 형이 떠올라서였다. 그것은 사슴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하이에나와도 닮아있었다. 살점 따위가 입안에 그득 할 것 같았다. 형이 빠는 것은 피 뿐이었는데도.
이마에 찬 손가락이 닿았다. 그러다가 너 큰형처럼 된다. 나이 더 먹으면 눈썹 사이에 주름 잡힐 걸. 우리는 더는 자라지 않는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이 더 먹으면, 하는 것이 낯설었다. 우리도 영원히 산다. 뱀파이어들처럼 영원히 산다. 늙지 않고 영원히. 다만 우리의 몸은 따뜻했다.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형은 아니었다.
우리가 영원히 산다면, 형은 왜 죽었지? 우리도 죽을 수 있었나? 나는 몇 번이고 자살을 시도하던 일족을 본 적이 있었다. 입에 총구를 밀어 넣고 방아쇠를 당기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사방에 피며 뇌수며 안구 조각들이 튀었지만 그는 머리카락과 옷, 날개 죽지에 붉은 자국만 남기곤 멀쩡하게 살아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이상해. 형은 왜 죽었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형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감아버렸다. 입술만 달싹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산책이나 가자.”
붉은빛이 섞인 파란 눈동자는 내 어깨 즈음을 한 번 훑어 내리고 창가로 향했다.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도 않고 손을 내밀었다. 나는 또 후회했다. 그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손을 맞잡았다. 몸이 떠올랐다. 발이 공중을 헤집었다. 그렇게 무식하게 움직이면 어떡하냐. 박자 맞춰서 움직여. 걸을 때처럼.
창밖으로 뛰어들어도 떨어지지 않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손을 깍지 껴잡고 별 위를 걸었다. 까맣고 파란 하늘 위를 걸었다. 발이 부드럽게 공기를 갈랐다. 거리의 누구도 위를 쳐다보지 않았다. 너 밤에 잘 못 나왔잖아. 좀 홀가분해? 형은 마냥 즐거워보였다. 그에 비해 나는 밟히지 않는 하늘이 어지러워서 눈을 몇 번이고 감았다가 떠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닿은 곳은 커다란 홀 앞이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떠들고 춤추고 있었다. 형은 손을 놓고 슥 웃었다.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다대곤 밖에서는 형이라고 하지 말아요, 하고 존댓말을 했다. 그건 사람 말을 하는 튤립을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낯설고 이상했다. 내가 너보다 훨씬 어린애 같은데 형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걸요, 하는 게 형의 설명이었다. 나는 일호, 일호, 하고 입속말을 했다. 낯선 울림이었다.
***
해가 지면 우리는 하늘을 걸었다. 우리 둘 중 누구도 그렇게 하자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건 곧 하루 일과가 되었다. 형은 매일 밤 창문을 두드렸다. 내가 창문을 열면 형이 가자, 하고 말했다. 창밖에서 손을 내미는 것은 형이다. 하늘을 지나 땅을 밟으면 형은 일호가 되었다. 나는 일호와 함께 온갖 무도회장을 돌아다녔다. 향수냄새와 술 냄새가 그득한 곳들이었다. 높은 웃음소리와 잘 알지도 못하는 왈츠곡이 가득한 곳들이었다. 드레스만 안 입었다 뿐이지 소녀가 된 것 같았다. 왜 이런 데만 가는 거야? 하고 묻자 일호는 한참 침묵하다가 글쎄. 여자 만나려고? 하고 답했다. 낯선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 대답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대답을 한 건 형이 아니라 일호였으니까. 나는 일호를 잘 모르니까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과 달리 나와 함께일 때 일호는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 내가 알던 형 같았다. 처음 둘이 갔던 무도회에서 여자의 손을 끌어당긴 게 일호가 여자에게 손대는 걸 본 마지막이었다. 일호, 뭐해? 일호는 눈이 맞닿자 어, 하고 말을 얼버무리다가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우리는 무도회에 가면 서로의 손을 잡고 춤췄다. 일호는 여자 춤도 남자 춤도 출 줄 알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면 그게 누구의 어떤 곡 인줄도 알았다. 이건 브람스의 왈츠곡이야. 15번. 나는 다 그게 다 거기서 거기 같은데, 하고 말했고 일호는 내 발을 가볍게 밟아 눌렀다. 기억하던 것보다는 아프지 않았지만 나는 엄살을 피웠다. 아, 왜, 내가 뭘, 하고. 그러면 일호는 즐거운 듯 내가 모르는 음을 흥얼거렸다.
일호는 형보단 많이 웃었다. 즐거워서 웃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일호는 매혹하듯 눈을 살풋 내리깔고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세차게 뛰었다. 왼쪽 가슴께를 꾹 누르며 내가 아는 얼굴이 짓는 모르는 표정이 낯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일호와 춤을 추고 있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두 사람 다 남자였거니와 아직 소년 같은 일호와 다 커버린 나는 부적절한 관계로 보였을 터였다. 그래서 나는 무도회가 지겹다고 했다. 그런 관계로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일호는 극장에 가자고 했다. 오페라 극장이었다. 우리 자리는 잘은 모르지만 비싸고 좋은 자리였다. 제목이 카르멘이라고 했다. 나는 카르멘이 누군지도 몰랐고 그런 여자는 취향도 아니었다. 그녀는 퍽 경박해보였다. 알지도 못하는 노래들은 지루해서 내내 졸았다. 일호가 이따금 허벅지를 꼬집었다. 그러나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곳으로 가자, 하는 말은 퍽 인상 깊었다. 나는 일호와 함께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낙타를 타고 사막으로 가는 상상을 했다. 가만히 앉아 모래바람이 흩날리고 별이 흩뿌려진 풍경을 보다가, 낙타에서 내려 손을 맞잡고 모래 언덕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장면을 꿈꿨다. 모래바닥에 나란히 누워 흔적을 남기다가 지겨워지면 날아올라 은하수 길을 걷고 싶었다. 사막에 가면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엔 큰형도 없고 우리가 손을 잡고 춤추는 걸 흘끔거리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고 나와 형은, 일호는 죽지 않았으니까.
돈 호세가 카르멘을 찔러 살해하는 걸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일호, 우리 사막에 가자.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곳으로 가자. 그러자 일호가 웃었다. 입이 살짝 벌어져 하얀 이가 보였다. 송곳니가 언뜻 보였다. 나중에 날 찔러 죽이기라도 하게요? 하고 말했지만 일호는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었다. 형은 안 죽잖아.
“나는 사막에 못 가요, 타서 죽을지도 몰라요.”
형은 죽었다. 어쩌면 다시 죽을 수도 있다. 시간에게 맞아 늙진 않지만 우리처럼 어떤 방법으로도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전보다는 약하고 낮에는 나갈 수도 없다. 나는 그게 문득 실감이 나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우리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잘 자, 하는 형의 말이 전부였다. 나는 잘 잘 수 없었다. 형이, 일호가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문득 창가에 서서 날 내려다보던 형이 어제보다 파리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잊어버렸다. 일호의 웃음 때문이었다.
***
“큰형. 나 뭐 좀 물어봐도 돼?”
큰형은 언제나처럼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장이 몇 번 넘어가고 나서야 큰형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입술만 우물이다가 물었다.
“일호 형은 왜 죽은 거야?”
일호 형 얘기가 나오면 큰형은 언제나 입을 다물었다. 다시금 책장이 넘어간다. 나는 재촉하듯 재차 물었다. 저번에 우리 사촌, 걘 자기 입에 총 쏴서 자살하고도 살아났잖아. 근데 형은 왜 죽었어? 큰형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성년이 되기 전에는 죽을 수 있어. 그래서 내가 너희들한테 해 지면 위험하니까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한 거야. 어릴 때부터 그런 말 많이 듣지 않았냐. 그렇게 죽은 애들이 몇 명 돼, 애들이 죽는 걸 몇 번 봤었어, 하고 큰형은 말을 마쳤다. 그렇게 죽은 애들 중에 우리 형이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왜 형이 죽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똑똑, 똑똑똑.
형이 창문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좀 늦은 때였다. 손에 못 보던 게 들려있었다. 한 손엔 흰 국화가, 한 손엔 모르는 꽃이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묻자 달맞이 꽃이라고 했다. 꽃말은 기다림이야, 하며 쥐어주는 것이었다. 올려다본 형은 유독 파리해보였다. 곧 죽을 사람 같았다. 죽기 직전의 사람 같았다. 어쩌면 시체 같았다. 붉었던 입술에 파란 빛이 돌았다. 파란빛이 더 많이 돌던 눈동자엔 붉은 빛이 진하게 돌았다.
“형, 왜 그래?”
형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별거 아닌데, 하며 꽃을 뺏어들어 먼지 쌓인 꽃병에 꽂아주었다. 옆에 국화도 얹어주었다.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발을 먼저 움직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눅눅했다. 하늘이 유독 까맸다. 형에게 날 수 있는 커다란 날개가 있었다면 아마 우리는 잔뜩 젖어서 추락했을지도 모른다. 습기가 몸을 적시고 아래로 끌어당길 것 같았다. 비 냄새가 났다. 비 오기 직전의 냄새가 났다. 비가 오려나봐, 하고 말해도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무도회장에 가자, 하고 말했다. 나는 그러겠노라고 했다. 우리는 급하게 날았다. 거칠게 땅으로 내려앉았다. 형, 정말 무슨 일 있어? 나는 무도회장의 일호를 형이라고 불렀지만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없어, 아무일도 없어요, 하고 형은, 일호는 말했다. 어딘가 다급해보였다. 무언가 갈구하는 배고픈 목소리였다. 배고픈 눈이었다. 굶주린 몸짓이었다.
일호는 나와 춤추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누군가를 찾는 것도 같았다. 나는 누구와도 춤추지 않았다. 누군가 다가오면 몸을 틀어버렸다. 대신 일호를 찾았다. 하얀 뒤통수를 찾았다. 일호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함께 있었다. 여자는 웃고 있었고 일호도 웃고 있었다. 유혹하듯 눈을 내리깔고 입 꼬리만 살풋 올린 웃음이었다. 그날 일이 떠올랐다.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형이 떠올랐다. 안 돼. 그러지 마. 일호가 얼핏 내 쪽을 봤다. 시선이 잠깐 닿았다가 떨어졌다.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것도 같았다. 두 사람이 한참 무어라 말하다가 무도회장 뒤로 사라졌다. 나는 그때처럼 둘을 쫓았다. 이번에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아무도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지 않았다.
일호는 지나치게 빨랐다. 내가 일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여자의 고개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있었다. 목덜미에는 이빨자국이 있었다. 언뜻 보면 점 두 개 같았다. 나는 일호를 불렀다. 형, 형 하고. 일호가 나를 보았다.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구겨지고 밟힌 종잇조각 같은 표정이었다. 일호가, 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붉은 입술이었다.
“이거, 이거 그만 하면 안 돼? 제발….”
나는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형이 비릿하게 웃었다.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웃었다. 그러다가, 하하, 하하하, 하고 웃었다. 웃음소리가 천장을 때리고 떨어졌다.
“너는 밥 안 먹고 살 수 있어?”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야, 하고 휙 날아오르는 형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형은 한참 나를 내려다보다가, 그렇게 서 있으면 네가 죽인 줄 알겠다, 그치? 하고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나도 복도를 빠져나와야 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
그날 이후 형은 내방 창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나는 밤을 새워 형을 기다렸다. 낮보다 긴 밤이었다. 저 하늘너머로 해가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게 보여야 잠을 청했다. 내내 자다가 오후 느즈막에 일어나 비척비척 내려가곤 했다. 큰형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퍽 무심한 투였지만 나는 그게 형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괜찮아, 했다. 사실 하나도 그렇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형이 보고 싶었다. 형의 노크소리가 듣고 싶었다. 창문 너머에서 손을 내밀고 가자, 하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따금 바람에 머리카락이나 깃털이 날릴 때면 천사 같았다. 형이 내민 손을 맞잡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호가 이따금 흥얼거리던 노래도 듣고 싶었다.
낮에는 해가 지기 전까지 방황했다. 나는 일호가 흥얼거리던 노래를 더듬더듬 따라하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이따금 어깨를 부딪치곤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도 무엇도 하지 않아서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나는 거기에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맞아도 상처는 곧 나았고 대개는 그들이 먼저 도망가곤 했다. 그러면 나는 몸을 털고 일어나 다시 그저 발 가는 대로 걸었다. 밤에 일호와 함께하던 장소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거리엔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강이 해를 삼키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강은 반짝거렸다. 형을 집어 삼켰던 강이었다. 형이 죽은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여기에 온 적이 없었다. 홀린 듯 걸었다. 다리 끄트머리에는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하얀 남자애가 제 다리를 흔들며 앉아있었다. 익숙한 뒤통수였다.
“어, 선배?”
그 애는 여전히 나를 선배라고 불렀다. 오랜만이에요, 하고 활짝 웃는 아이는 해바라기 같았다. 하나도 나이먹지 않은 얼굴이라서 이질감이 들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하고 묻는 것이 아이처럼 천진해보였다. 동시에 어쩌면 아주 나이 들어보였다. 그 애는 나를 빤히 보았다. 몸 어딘가를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었다. 아니, 이제 보니 어딘가 익숙한 눈이었다. 눈을 내리깔고, 입 꼬리만 살짝 들어 웃는 것이 익숙했다.
“뭐 찾는 거 있어요?”
언뜻 입새로 송곳니가 빛났다. 언뜻 눈가에 붉은 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래도 아직 해는 떠있었다. 완전히 저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애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연기가 되어 흩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 하고 우물거려야 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나 뱀파이어 맞는데. 선배가 선배네 형님 찾는 것도 알고 있어요.”
“형 어디 있어?”
“일호형님은 선배얼굴이 별로 안 보고 싶대요. 어쩌죠?”
“백모래야.”
“그래서 내가 대신 보러왔어요.”
아이가 웃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던 눈이 익숙했다. 우리 꽤 친했었는데. 네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러는 거야? 하고 물었다. 어깨를 으쓱 하는 게 조금은 그 애 답지 않았다. 선배, 선배 하고 웃으며 날 따르던 앤데. 어깨에 손이 닿았다.
“선배, 안 죽죠? 피 빨려도 안 죽을 거잖아요. 그죠?”
이건 위험하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불같은 것이 몸의 핏줄을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다. 온몸의 세포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도망가. 도망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알음알음 뒷걸음질 쳤다. 힘이 풀렸다.
“그럼 형님한테 좀 줘도 괜찮지 않겠어요? 아, 시험해 볼래요?”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목덜미에 차가운 숨이 닿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무언가가 피부를 가볍게 긁어내렸다. 죽을지도 몰라, 죽을지도 몰라. 손이 닿았다. 목덜미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익숙한 손이었다. 아이가 떨어져나갔다. 아이가 어, 하고 고개를 들었다.
“형님?”
“내 동생한테 손 대지마.”
형이 거기에 서 있었다. 여전히 파리해보였지만 이를 세우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래, 학교 다닐 때 형은 곧잘 저런 표정을 짓곤 했다. 나는 형에게 그 표정 개 같아, 했다가 얻어맞곤 했다. 아이가 형님 안 죽었네요, 하고 옷을 툭툭 털어냈다.
“형님이 나한테 이래도 돼요? …내가 형님 살려줬는데.”
“…꺼져.”
해뜨기 전에 돌아와요, 하고 아이는 순순히 사라졌다. 바람처럼,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느덧 해가 져있었다. 하늘이 까맸다.
“…일호 형.”
형은 지친 것 같았다. 눈동자엔 초점이 없어서 꼭 파랗고 빨간 유리구슬 같았다. 나는 형의 팔을 붙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형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이거 놔. 형은 제 손목을 비틀고 나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부질없었다. 어린아이가 바르작거리는 것 같았다. 키도 작고 힘도 없는 형은 애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안쓰러웠다. 나는 이렇게나 커버렸는데, 형은 자라지 않아서, 그때 모습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형을 안아주고 싶었다. 달래주고 싶었다. 등을 쓸어주고 싶었다. 우는 아이한테 하듯 그렇게.
“일호, 일호 형.”
마주 본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파리한 얼굴이었다. 형의 입술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붉지 않았다. 아마 피를 못 마신 탓이리라. 이거 놔, 이 새끼야. 형이 손을 올려 코와 입을 틀어막는 게 보였다. 피 냄새 나니까 떨어져, 하고 말했다. 그래도 나는 형을 놓지 않았다. 그대로 끌어당겨 안았다. 딱딱하고 차가운 몸이었다.
“피 마셔도 돼. 난 안 죽으니까.”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말랑하고 차가웠다. 목덜미에 무언가 와 박혔다. 딱딱하고 뜨거웠다.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 꿈결 같은, 꼭 꿈같은 기분이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습기가 차올랐다. 눈앞이 흐릿해졌다가 정신이 맑아졌다. 무언가가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도 같았다. 어깨에 손이 닿았다. 밀쳐졌다. 형은 두어 발자국 쯤 떨어져서 나를 보았다. 언젠가 그랬듯 내 어깨 즈음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그러곤 몸을 돌렸다. 등허리에 달린 날개가 낯설었다. 형은 내게 뒷모습을 잘 보이지 않았었는데.
“나 갈게, 잘 지내.”
지나치게 일상적인 투였다. 밥 맛있었어, 하고 말하는 것과 같은 어투였다. 그런데도 어딘가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 형이 내 방에 날아들었던 날, 그날 했던 말과 같은 말이었는데도, 같은 어투였는데도 나는 그런 것을 느꼈다. 목 끝이 뜨거웠다. 언제나 눈물은 목 끝에서 올라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삼킨 숨이 지나치게 차가워서 눈물로 쏟아질 것 같았다.
“도망가지 마, 형.”
나는 형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다만 형이 돌아서주길 바랐다. 여기 봐줘, 제발. 처음으로 일호, 일호 했을 때처럼 입속말로 그랬다. 형은 두어 걸음 더 내딛다가 몸을 틀었다. 그러곤 팔을 벌렸다. 손을 내미는 대신 팔을 벌렸다. 내일 또 올게, 하는 대신에 다른 말을 했다. 안아줘, 안아줘. 형의 고개가 땅을 향하고 있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상관없었다. 나는 가만히 형을 끌어안았다. 형의 몸은 따뜻했다. 정말 따뜻했다. 온기가 남은 몸이었다.
***
우리는 언제부턴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형은 내 방에서 그냥 형이었다. 형이 오면 나는 목을 내주었다. 목덜미엔 망설이듯 간지러운 숨이 한참 맴돌았다. 나는 이게 싫어, 하고 형은 말했다. 난 괜찮아, 하고 말은 했지만 날카로운 감각 후에 오는 전희가 기분 좋았다. 그런 말을 하면 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지만, 꼭 배를 맞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해졌다. 행위 아닌 행위였다. 피를 빨 때 형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형의 내리깐 눈을 빤히 보곤 했다. 그러면 형은 낮게 한숨을 뱉고는 안아줘, 하고 내 무릎께에 주저앉곤 했다.
가슴팍에 닿는 형은 따뜻했다. 가만히 등에 고개를 기대면 미약하게나마 심장이 뛰곤 했다. 형이 피를 빤 직후엔 그랬다. 나는 한참 눈을 감고 심장이 뛰는 걸 느끼다가 형을 꼭 안아주었다. 열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그렇게 하면 형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주로 뱀파이어가 되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형은 이따금 그 애 이야기를 했고, 꽃 이야기를 했다. 피가 빨릴 때의 감각이나, 피를 빨 때의 감각이나, 처음 뱀파이어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나는 형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들을 늘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형의 얼굴을 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형은 좀 이상했다. 형은 죽은 듯 침묵하다가, 한참 손을 매만지다가, 느릿하게 입을 여는 것이었다. 동조도 대답도 필요 없다는 듯 빠르게 말을 뱉었다. 꼭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 같았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 사람 같았다.
이호. 죽은 사람하고 키스해본 적 있어? 죽기 직전의 사람과. 어떤 여자의 피를 빨았어. 뱀파이어가 된지 얼마 안 되어서였지. 피를 덜 빨았었나봐. 여자는 아직 살아있었어. 나는 그 여자가 나한테 저주를 퍼부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러기엔 여자의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거야. 숨을 헐떡이다가 마지막으로 키스해 주세요, 하고 말하더라. 나는 망설이다가, 여자에게 입을 맞췄어. 그건 내 첫 키스였어. 입술이 조금은 따뜻했어. 내가 입을 벌리니까 여자가 필사적으로 혀를 얽어냈어. 부드러웠어. 그런데 그건 금방 굳어버렸어. 돌덩이처럼. 따뜻했던 입술도 차갑게 식어버렸어. 그건 굉장히 싸한 느낌이야. 박하사탕을 그냥 목 끝으로 넘겼을 때처럼, 치약을 그냥 삼켰을 때처럼. 내 팔을 꼭 잡고 있던 손이 그대로 굳어 떨어지지 않을 때의 그 느낌이란. 간신히 입술을 떼어내고 여자의 시체를 옮길 때, 손이 떨어지지 않아서 억지로 뜯어냈어. 살덩이를 그대로 쥐어뜯는 느낌이었어. 언뜻 본 여자의 시체는 꽤 예뻤어. 창백하게 식은 피부도 아직 붉은 기가 남은 뺨과 입술도 그랬어. 처음으로 여자한테 또 입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어.
다시 키스할 수는 없겠지만, 하면서 형은 나를 보았다.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입천장을 혀끝으로 간질여도 치열을 죽 쓸고 지나가도 아무것도 반응해주지 못하니까. 나는 웃었다. 형, 키스하고 싶어?
형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말고요.
“해 뜰 때 키스해줘요.”
형은 밖의 일호처럼 말하며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웃지 못했다. 입꼬리가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뱃속이 차갑게 식었다. 사뭇 비장한 얼굴이었다. 해 뜰 때 빛을 보면 형이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사라져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형이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창문은 낡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끼이익. 내게는 그게 꼭 비명소리처럼 들렸다. 안 돼, 하지 마. 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잡아끌었다. 나는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형은 지붕 끄트머리에 앉아 나를 보았다. 전부터 여기 꼭 올라가고 싶었어요, 하고 숨을 멈추고는 말했다. 퍽 뜬금없는 말이었다.
“햇빛자국이 나타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요.”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말이었다. 안 그러면 각설탕처럼 녹아내릴지도 몰라요. 백모래가 그렇게 말했어요, 하고 형은 웃었다.
“나는 정말 내가 녹아내릴지 궁금해요. 백모래는 낮에도 잘 돌아다녔잖아.”
차갑게 식은 손이 머리를 쓰다듬다가 볼을 감싸 쥐었다. 겨울 공기처럼 차게 식은 숨이 코끝을 간질였다. 형, 지금이라도 돌아가자. 응? 차가운 입술이 입을 틀어막았다. 부드러운 혀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실눈을 뜨고 본 형의 어깨 너머에서 어스름하게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밝아오고 있었다.
'2차 창작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코마] 눈의 실종 (2) | 2015.09.20 |
---|---|
[타카아야] 당신의 조각 (0) | 2015.07.12 |
[짭나이프] 여름의 조각들 (0) | 2015.02.05 |
[이호일호] 햇빛자국 특전 (0) | 2015.02.01 |
[이호일호] 꿈과 욕망 (0) | 2014.12.07 |
원래 처음이라는 건 잊기 힘든 법이다.
야마다 리키치는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던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얬다. 손이 빨갛게 얼어붙었다. 리키치는 손을 녹이고 싶었지만 피가 잔뜩 묻어 있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옷 위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손에 든 검붉은 물은 지워지지 않았다. 영영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시체가 입을 헤 벌리고 누워 있었다. 팔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악몽이었다. 야마다 리키치가 한숨을 뱉었다. 하얀 숨이 하늘로 날았다가 공중으로 스러졌다. 눈 위에 남은 핏자국은 유독 붉었다. 시체를 파묻어야 할까. 아니, 아니다. 꽃이면 예우는 충분할 거였다. 그러나 눈을 뚫고 피어나는 꽃은 없었다.
그래서 야마다 리키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꽃을 바칠 수도 없고 시체를 묻어줄 수도 없어서였다. 달릴 때 마다 뽀득뽀득 소리가 났다. 발자국이 남을 터였다. 눈 토끼를 쫓는 늑대처럼 누군가가 뒤를 밟을지도 몰랐다. 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다 죽었으니까. 리키치는 하염없이 달리다가 문뜩 흰 눈이 빨갛게 물들던 것을 떠올렸다. 눈이 녹으면 피는 연하게 무너져 땅에 스며들겠지. 하지만 시체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을 거였다. 아마 누군가가 찾아주기 전까지 그 자리에 남을 거였다. 아니. 어쩌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아서 썩어 문드러질지도 몰랐다. 머릿속에서 시체의 뻥 뚫린 눈으로 구더기가 왔다 갔다 하는 게 그려졌다.
리키치는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서 있는 것조차 벅찼다. 발걸음의 끝은 인술학원에 닿아있었다. 누구라도 보고 싶었다. 유년기의, 유년기의 시작이었던 곳이었다. 누군가를 죽일 까만 미래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처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때. 그리고 그 앞에 코마츠다 슈사쿠가 서 있었다. 입문표를 들고. 리키치는 멍하니 코마츠다를 바라보았다. 코마츠다는 손을 후후 불고 있었다.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어, 리키치 씨! 코마츠다가 활짝 웃다가 리키치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얼굴이며 손이며 옷에 묻은 붉은 자국까지 훑고는 파랗게 질렸다. 코마츠다 군. 리키치가 작게 웅얼이며 다가섰다. 코마츠다가 아, 하고는 리키치 옆에 섰다. 그리고는 리키치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손을 끌어다 잡았다. 손이 코마츠다의 볼에 닿았다.
“리키치 씨, 손이, 너무 차가워요…”
그러는 코마츠다의 볼도 빨갛게 얼어 있었다. 리키치는 문뜩 손이 끈적끈적하다고 생각했다. 손 끝에서, 굳은 시체의 피가 녹아 코마츠다의 얼굴위로 흘렀다. 코마츠다 군, 울어? 코마츠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는 울고 있었다. 그러는 리키치 씨는 왜 그런 표정이에요? 말을 듣는 순간 리키치는 얼굴에 피가 쏠리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볼이 뜨겁다. 아. 너무 뛰었나 보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야마다 리키치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잃을 뻔한 날을 떠올렸다. 코마츠다 슈사쿠가 습격을 받은 날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로부터 삼 년이 지난, 딱 삼 년이 지난날이었다. 꼭 누군가가 복수라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가겠다는 것처럼.
코마츠다 슈사쿠는 목숨대신 눈을 잃었다. 눈이 아물질 않아서 여전히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저러다가 눈이 있던 자리가 무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도 그랬다. 리키치는 매일 말없이 코마츠다 곁에 앉아 있었다. 코마츠다도 말이 없었다. 그건 단순히 리키치가 곁에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딱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리키치는 코마츠다 군, 하고 조용히 불렀다. 코마츠다가 작게 웃었다. 이리 와 줘요, 리키치 씨. 리키치는 가만히 코마츠다의 손을 잡아주었다. 손가락이 손바닥을 간질이더니, 더 가까이 와달라고, 그렇게 속삭였다. 어떤 표정 짓고 있는지 보고 싶어요. 근데 볼 수가 없으니까…. 리키치는 코마츠다의 손을 제 볼에 올려주었다. 손가락이 얼굴을 더듬고 지나갔다. 리키치는 문뜩 목 끝이 뜨겁다고 생각했다.
“리키치 씨? 뺨이, 축축해요…….”
리키치는 숨을 참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뱃속에 있는 모든 걸 토해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너를 좋아했노라고, 좋아하고 있다고, 하는 말까지도 입술 사이로 삐져나올 것 같아서였다. 코마츠다는 더 이상 리키치의 볼이 축축하지 않을 때까지 얼굴을 쓸어주었다.
'2차 창작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호일호, 햇빛자국 (0) | 2019.10.22 |
---|---|
[타카아야] 당신의 조각 (0) | 2015.07.12 |
[짭나이프] 여름의 조각들 (0) | 2015.02.05 |
[이호일호] 햇빛자국 특전 (0) | 2015.02.01 |
[이호일호] 꿈과 욕망 (0) | 2014.12.07 |
Request By 티님
눈을 떴을 때, 더운 냄새가 났어요. 끈적끈적하고 비릿하고 역겨웠죠. 토할 것 같았어. 나 혼자였어요. 팔 언저리가 욱신거렸고. 팔이 부러진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깊게 찔렸거나요. 그런 와중에도 나는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어요. 그건 후미코 쨩도 아니고 텟코 쨩도 아니었어요. 그건… 검지손가락이었습니다. 깨끗하게 잘려 있었어요.
사이토 타카마루가 사라졌다. 돌아온 것은 아야베 키하치로와 누군가의 검지손가락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타카마루의 것일 거라고 했다. 적갈색 얼룩이 눌어붙은 손가락 단면에 노란 머리카락이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손가락 모양이 닮은 것도 같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야베 키하치로는 그 일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손가락이나 돌려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것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사이토 타카마루, 하는 이름만 나오면 입을 다물었다. 다만 얌전히 누워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친 팔을 까딱이다 이따금 낮게 신음하면서.
“키하치로.”
아야베가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한 지 며칠 째 되던 날, 타키야사마루는 언제까지 그 손가락을 쥐고 있을 거냐고 물었다. 손가락은 썩어가고 있었다.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벌레가 끓고 있었다. 아야베는 벌레가 제 손을 타고 오르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나무의 등줄기만큼이나 마른 입술이었다.
“내 손으로 땅에 묻을 수 있을 때까지.”
언제나처럼 무심한 투로, 아야베는 고개를 돌렸다.
여름이었다. 손가락에 붙은 살점들이 물러지고 뜯겨나가는 걸 아야베는 보았다. 가끔은 제 살이 같이 물러지고 뜯겨나가기도 했다. 피가 끈적하게 묻어나오곤 했다. 그러나 아야베는 아직 삽을 제대로 들 수 없었다. 작은 모종삽이나 겨우 쥘 수 있었다. 타키야사마루는 질겁을 했다. 왜 그걸 아직도 버리지 않는 거냐고. 병문차 찾아온 센조도 움찔했다. 왜 그걸 쥐고 있는 거냐고. 아야베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사쿠는 상처를 치료하려면 손가락을 놓아야 한다고 했다. 아야베는 고개를 저었다. 이사쿠는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곪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 일으켜 세워주세요.”
이사쿠가 아야베의 팔뚝 언저리를 잡았다. 아야베가 조그맣게 아, 했다. 비틀거렸다. 꼭 처음으로 걸음을 떼는 아이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이가 아니었으므로, 이미 자랄 대로 자라있었으므로 몇 발짝 뗄 때마다 앞에 놓인 것들을 밟고 차고 부숴야 했다. 아야베의 발자국이 금세 붉어졌다. 이사쿠가 괜찮냐고 물었다. 더 쉬어야 한다고 했다.
“묻어줘야 해요.”
그린 듯 선명한 목소리였다. 이사쿠는 침묵해야 했다. 아야베는 모종삽을 찾아달라고 했다. 비 한 방울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굳은 땅은 너무 딱딱해서, 이사쿠는 고개를 저었다. 저 손으로 굳은 땅을 팔 수는 없을 터였다. 흙은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스 흩어질 터였다. 그건 무리라고, 이사쿠가 말했다. 아야베가 그럼 화단에 묻어주면 되잖아요, 했다. 이사쿠는 아야베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어서 다시금 침묵했다.
그렇게 해서 아야베가 모종삽을 쥐었다. 식어있던 눈이 까맣게 타올랐다. 아야베는 손가락을 내려놓고 두더지처럼 갈색 흙을 파헤쳤다. 벌레들이 손가락 주위로 까맣게 몰려들었다. 아야베는 땅을 파다말고 손가락을 주워 올려 세게 털었다. 벌레들이 아야베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손등 위에 빨간 점이 남았다. 빨갛게 이빨 자국들이 남았다. 아야베는 앓는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거의 뼈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앙물고 손가락에서 손톱을 뜯어내었다. 살점이 조금 뜯겨 나왔다. 벌레 두어 마리가 같이 찢겨 나왔다. 녹색 즙이 조금 묻어나왔다.
"타카마루 씨."
아야베는 숨을 몰아쉬다가 빈 손가락을 조그마한 구덩이 안으로 떨어뜨렸다. 그러곤 섬을 쌓듯, 성을 쌓듯 흙을 올려 봉우리를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꼭 무덤 같았다.
그 자리엔 노란 꽃이 피었다. 아야베 키하치로의 팔이 완전히 나아졌을 때의 일이었다. 아야베는 매일 꽃에 물을 주었다. 꽃이 활짝 필 무렵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사이토 타카마루의 흔적도,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그나마 발견할 수 있는 가장 큰 조각은 검지손가락이었다고. 그날 아야베는 종일 욕탕에서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는 아야베 키하치로가 금세 멀쩡해져서 다시 땅을 파고 임무를 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야베는 때때로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멀쩡해 졌다는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타카마루 씨가 그렇게 되고 나서 나는 타카마루 씨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그 장소에 종종 찾아가곤 했습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처음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어요. 며칠이고 찾아다녔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미용사가 있다고. 검지가 없다고. 그 말을 듣고 나는 미용사가 있다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정말로 익숙한 뒷모습이었어요. 타카마루 씨였어요. 그런데 타카마루 씨는 나를 못 알아 봤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인양 어서오세요, 했습니다.
나는 타카마루 씨,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목 끝에서 솜 같은 것이 느껴져서, 목이 꽉 막혀서 아무 말도 바깥으로 뱉어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목을 양손으로 꽉 쥐었습니다. 구더기에게 뜯어 먹힌 흔적이며 아직 아물지 않은 팔의 상처가 빨갛게 아렸어요. 시야가 점점 흐려졌습니다. 이상한 기분이었죠. 뺨으로 더운피가 몰렸습니다. 속에서 파도치듯 무언가 울렁이다가 뺨 위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눈가가 축축했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후미코 쨩하고 텟코 쨩 밖엔 없었는데. 그래서 쉬고 싶었어요. 이제는 그만 쉬고 싶었어요.
그때 타카마루 씨가, 울지 마요, 했습니다. 나는… 타카마루 씨, 했습니다. 물론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가장 큰 조각이 손가락이었다." : 해리포터 3권이 모티프
*"뺨으로 더운피가 몰렸다." : 가을방학 <더운 피>
*타카마루 씨라는 호칭 : 원작에서 '상' 하는 걸 그대로 '씨'로 번역함
'2차 창작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호일호, 햇빛자국 (0) | 2019.10.22 |
---|---|
[리코마] 눈의 실종 (2) | 2015.09.20 |
[짭나이프] 여름의 조각들 (0) | 2015.02.05 |
[이호일호] 햇빛자국 특전 (0) | 2015.02.01 |
[이호일호] 꿈과 욕망 (0) | 2014.12.07 |
여름의 조각들
텔레비전에서 바다를 보여주고 있었다. 바닷물은 지나치게 파랬다. 누군가가 물감배합을 잘못해서 저런 색이 나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저거 CG 아니냐고 이호가 물었다. 일호가 영화 볼 땐 조용히 보는 거라며 이호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물속을 걷던 하얀 발이 밖으로 나왔다. 발가락 끝에 물기가 서려있었다. 카메라가 발을 클로즈업했다. 도대체 왜 저런 걸 클로즈업 하는 거야, 하고 이호가 투덜거렸다. 일호가 입 닥치라며 이호의 등을 세게 때렸다. 풍선이 터지듯 탕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바람에 남자가 여자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오수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일호가 미안하다고 했다. 이호가 왜 나한텐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묵살되었다.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여자가 하늘을 향해 물을 뿌렸다. 물방울이 햇빛을 받아 작은 무지개를 만들었다. 물방울 하나하나 터져나가는 것이 진주목걸이가 흩어지는 것 같아보였다. 여자가 나오자 오수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이호는 저렇게 물을 뿌리면 짠물이 지 눈에 들어갈 텐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다가 일호에게 발을 밟혔다. 이호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고는 일호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화면이 가려 그림자를 만들었다. 푸른빛이 이호의 등 뒤에서 일렁였다. 오수는 텔레비전을 보려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가 볼 수 있는 건 이호의 하얀 가운과 머리카락 그리고 찡그린 얼굴뿐이었다.
“아, 왜! 맞는 말이잖아! 왜 형은 맨날 나만 때려?”
“네가 맞을 짓을 하니까. 속으로만 생각해요, 생각할 줄 몰라요? 너는 뇌가 입에 달렸어요?”
“나는 뭐 말도 못하나! 형은 내 발이 불쌍하지도 않아?”
“넌 네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는 내 귀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 사이사이로 여자의 웃음소리와 남자의 말소리가 섞여 들렸다. 오수가 몸을 일으키더니 아예 텔레비전 앞에 가서 앉았다. 일호는 그러고 보니 넌 설거지도 안하고 영화나 쳐 보고 있느냐며 이호에게 타박을 주다, 텔레비전 화면과 코가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앉아있는 오수를 발견하곤 보스, 눈 나빠져요! 하고 소리를 질렀다. 오수는 홀린 듯 화면만 보았다. 이제 남자와 여자가 바나나 보트를 타고 파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트는 지나치게 선명한 노란색이었다. 그 표면에 물방울이 맺혔다가 바람에 날아가 비처럼 다시 바다로 돌아가곤 했다. 지나치게 새하얘서 CG 같은 여자의 목덜미, 그런 그녀의 허리를 껴안고 있는 남자의 그을린 팔뚝과 등이 차례로 클로즈업 되었다. 모든 것에 물이 서려있었다. 햇빛이 서려있었다. 형이 소리 지르니까 보스가 저렇게 앞에 가서 보는 거잖아, 하고 말했다가 이호가 한 대 더 얻어맞는 소리가, 남자가 여자의 귀에 무어라고 말하는 소리를 묻어버렸다. 마침내 오수가 고개를 두 사람 쪽으로 휙 돌렸다. 일호와 오수의 눈이 마주쳤다.
“어, 어? …미안해요, 많이 시끄러웠지.”
“있잖아요, 일호.”
“응, 형이 많이 시끄러웠지.”
“넌 닥쳐봐요. 왜요, 보스?”
“우리도 휴가 가요. 바다로.”
오수가 낮게 숨을 삼켰다. 저렇게 새파란 바다로 가요. 일호랑 이호, 고생하잖아요. 하루쯤은 꽃집도 닫고, 그레고르도 데리고 섬으로 가요. 사람이 많은 건 힘드니까요. 다나씨랑 스푼 분들도 모셔왔으면 좋겠어요. 다 같이 휴가를 가는 거예요. 바나나보트는 아니더라도 요트를 타고 싶어요. 저녁엔 고기도 먹구요.
일호가 빙긋 웃었다. 이호도 씩 웃었다. 그래요, 그럼. 우리도 휴가가자. 보스가 말한 대로 바다도 보고 고기도 먹고 해요. 아니지, 저녁은 내장탕이지, 하고 이호가 말했다. 일호가 넌 제발 닥치라며 다시금 웃었다. 오수도 활짝 웃었다.
2014/07/27
이영싫 전력 60분 - 주제 여름휴가
'2차 창작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호일호, 햇빛자국 (0) | 2019.10.22 |
---|---|
[리코마] 눈의 실종 (2) | 2015.09.20 |
[타카아야] 당신의 조각 (0) | 2015.07.12 |
[이호일호] 햇빛자국 특전 (0) | 2015.02.01 |
[이호일호] 꿈과 욕망 (0) | 2014.12.07 |
비 냄새가 나, 하고 형이 말했다. 정말로 땅이 젖은 냄새가 났다. 커튼 사이로 언뜻 본 밖은 회색이었다. 나는 형을 끌어안고는 더 잘래, 했다. 등줄기가 선명하게 만져졌다. 겨울날의 나뭇가지 같은 등줄기였다. 차갑고 앙상한. 형은 두어 번 뒤척이다가 내 어깨에 입술을 묻었다. 그러고는 이를 세워 죽 긁어내리는 것이었다. 그건 간지럽고 이상한 기분이라서 정신이 들었다. 제대로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건 그저 하얀 머리카락과 귀에 박힌 까만 피어스밖에 없었다. 창백한 피부밖에 없었다. 그것들이 숨을 틀어막는 것도 같아서 나는 한참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어 형, 간지러워, 하고 말했는데, 형에게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말 없는 형은 꼭 지난밤의 형 같기도 해서 이상했다. 무슨 말을 어떻게 꺼내야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형은 여전히 내 어깨에 입술을 묻고, 나는 형의 등줄기를 매만지면서, 우리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밖에 나가고 싶어.”
형은 죽지 않았다. 설탕처럼 녹아내리지 않았다. 다만 하얀 날개 죽지가 그을려 까맣게 되었을 뿐이었다. 형은 이제야 좀 뱀파이어 같아졌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형이 천사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입을 맞췄던 어느 밤중에, 그 애가 웃으며 잘 됐네요, 선배 형님, 하고 찾아온 건 조금 얄미웠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떻게 보면 형을 살려준 셈이었으므로.
흐린 날이면 형은 나가고 싶어 했다. 햇볕이 세지 않아서였다. 형과 나는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섰다. 밤에 같이 걸었던 거리를 비를 맞으며 낮에 걷기도 했고 마당을, 젖은 땅을 맨발로 밟기도 했다. 우리는 이제 같이 산다. 큰형은 일호 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낯설어 하고 피했지만, 결국엔 일호, 하고 불러주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셋이서 살게 되었다. 우리는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고 형은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한 채로 남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형을 위해 집에 꽃을 심었다.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일호 형이 꽃들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였다. 우리 정원에는 해바라기와 달맞이꽃이 나란히 있었다. 둘을 나란히 있게 만든 본인은 맑은 날을 꺼려서 해바라기가 활짝 핀 건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따금 커다란 밀짚모자를 쓰고 나타나선 꽃들에 물을 주곤 했다. 너무 맑은 날 나가면 날개 죽지가 쑤신다며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오늘은 아무래도 비가 오는 것 같았다. 형은 또 한참 있다가 어깨에 대고 나가자, 하고 웅얼거렸다. 그럴 때면 형이라기보다는 애 같았다. 외관상 나보다 어렸으므로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랬다. 나는 알았어, 일어날게, 하고 형에게 입을 맞췄다. 나가자, 하고 형을 안아 일으켰다. 우리는 언젠가의 밤처럼 창문을 열고, 손을 맞잡고 빗속으로 날아올랐다.
형은 환상 같은 게 아니었다. 햇빛자국이 나타나도 사라지지 않는 진짜였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수 있었다.
▼And
책 사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네요!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표지 빼고 다 부족했지만요. 위에 특전도 A5기준 2P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특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분량이지만... 그래도 비밀번호 걸어서 특전 올리는 게 제 로망이었으니까 그대로 둘래요.
음. 제발 재고가 안 남았으면 좋겠네요... 제 책을 한 권 이상 보게 되면 너무 끔찍할 거 같아요.
이 책이 뱀파이어 AU가 된건 어... 제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라는 책을 봤어요. 그러다가 문뜩 쌍둥이는 안 죽으니까 피 빨려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거예요. 최고의 피 셔틀인 거 아냐... 목덜미에 얼굴 파묻는 것도 섹시하고 해서 이런 썰을 풀게 됐어요. 보통은 뱀파이어인 애가 왼쪽이긴 한데 어디선가 뱀파이어는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얘기 듣고... 뱀파이어는 고자구나 싶었... 어요... (님들 : ...??? ) 그래서 뱀파이어인 일호가 오른쪽입니다.
심장이 뛰지 않음 -> 몸에 피가 돌지 않음 -> 남자가 성적인 기능을 하는 것은 중심에 피가 몰려서라고 했음 -> 따라서 피가 돌지 않는 뱀파이어는 성행위를 할 수 없음 (...)
ㅇㅇ... 원래는 이 썰이 그렇게 건전한 게 아니었어요. 책으로 낼 생각도 없었구... 묘사같은 것도 많이 순화되고 그랬어요. 그래도 전체이용가로 내면서는 양심이 조금 아야하더라구요... 노출도 직접적인 묘사도 없었으니까 괜찮긴 하겠지마는.
시대배경은 좀 애매한 게 중세도 아니고 현대도 아닌 느낌이라서... 학교 얘기 보면 현대 같고 무도회장 얘기 보면 중세시대 쯤 같고 그렇잖아요...? 초기 설정은 그쯤이었는데 교복 입은 쌍둥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ㅎㅎ... 어차피 AU니까요. 어딘가의 평행우주~
본작 일호 외관나이는 중3~고1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일족들이 성년이 되기 전에 죽을 수 있다는 설정은 어떻게 번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 영원히 살면 나중엔 일족들이 너무 많아지지 않을까 싶어서 예전에 풀어둔 썰이었는데 뱀파이어썰이랑 이런식으로 짬뽕시키게 될 줄은 몰랐어요. 사실 일호가 어린 건 자기보다 어린애한테 형이라고 부르는 게 보고싶어서... 그리고 어린 일호도 보고싶었어요. 형한테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이호도 보고싶었구요. 일호가 날 수 있는 건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랑 소피가 같이 공중산책 하는 게 너무 예뻐서... 그런 장면을 넣고 싶었어요.
저기 저 특전은 수 많은 결말 중 하나로 두고 싶어요. 어떤 평행세계에선 일호가 햇빛때문에 그대로 녹아내리기도 하고 이호는 혼자가 되고 하지만 본편이 어두우니까 특전이라도 좀 밝은 게 좋을 것 같아서 저렇게 뒀습니다. 둘이 같이 연애도 하고 꽃도 키우고 행쇼했음 좋겠네요. 적어도 저 글안에서는요.
그리고 모래랑 이호는, 사실 본작에서는 마감에 쫓기느라... 모래나오는 부분에서 너무 숨차서 제대로는 묘사 못했지만, 둘 관계에 뭔가 더 있긴 했어요... 그리고 모래랑 일호도요. 언젠간 햇빛자국에 나오는 모래랑 이호 과거부분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모래이호나 이호모래라는 커플링명을 앞에 달고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일호가 뱀파이어가 되서 뭘 했는지도 좀 쓰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책이 너무 길고 지루해 질 것 같아서 뺐어요. 이것도 언젠간 더 쓰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면 모래일호 이런 이름 달고 나오겠지...
어째 이게 특전보다 긴 느낌이네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 책으로 찾아뵙고 싶어요~ 안녕!
'2차 창작 > ET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호일호, 햇빛자국 (0) | 2019.10.22 |
---|---|
[리코마] 눈의 실종 (2) | 2015.09.20 |
[타카아야] 당신의 조각 (0) | 2015.07.12 |
[짭나이프] 여름의 조각들 (0) | 2015.02.05 |
[이호일호] 꿈과 욕망 (0) | 2014.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