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에 입을 맞추면 옅게 밴 흑연과 물감 냄새 그리고 종이 향이 났어. 네 냄새였지. 졸고 있는 네 옆에 다가가 앉을 때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때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 코끝으로 스며들던. 그림을 그리는 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파레트를 들고 있던 팔을 붙잡고, 구멍 새로 삐져나온 손끝에 입 맞출 수 있던 때가 좋았는데. 이제 눈을 감고 열을 세어도 그때 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미소 지었는지 아니면 방해하지 말라며 찡그렸다가 푸스스 웃음 지었는지. 너는 참 봄 같았어. 많이 좋아했는데.
***
꽃은 한 번에 폈다가 한 번에 져버렸다. 정신없이 일에 시달리다 보니 목련은 언제 입을 벌렸고 철쭉은 언제 고갤 떨어뜨렸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더 이상 꽃을 똑바로 보지 않게 되었다. 괜히 어지러워져서 눈을 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이 지나고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 없게 되었을 때부터, 계절의 흐름을 사람들의 옷차림과 피부에 닿는 온도로 잡아내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햇빛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멍청한 회사주가 여름 생각은 않고 난방 효과를 높이겠다며 건물 한쪽 벽면을 전부 유리 창문으로 바꾸는 바람에 우리 회사 사람들은 정말로 햇빛에 찔려 영혼을 토하며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빌어먹을 전력을 아끼자느니 어쩌자니 하는 정책 때문에 에어컨을 마음 놓고 틀수도 없었다. 선풍기로는 역부족이었다. 사실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도 않았다. 에어컨을 끄면 실내 온도가 과장 좀 보태서 40도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제 6월이었다.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말하기엔 시기상조지. 모두가 여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아니, 어쩌면 여름은 이미 우리 앞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열사병으로 노인 하나가 사망했다는 뉴스가 어제 저녁에 짤막하게 나왔으니까. 정정하겠다. 여름은 봄을 밀치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예고 없이 찾아와서 햇빛으로 사람들을 찔러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겨울이 오면 아마도 예고 없이 사라질 터였다. 그 애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 애가 어디로 갔는지 아직도 알지 못했다. 남기고 간 부스러기들만 붙들고 있었다. 이를테면 참아야 할 일이 있거나 떠오르지 않는 게 있을 때 눈을 감고 열을 세는 버릇이라던가. 화를 못 참아 종종 사고를 쳤던 내게 그 애가 알려줬던 거였다. 손을 뻗어 눈을 감겨주었다.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눈을 감고 열을 세 봐. 숫자를 다 세고 눈을 뜨자마자 그 애는 내게 입 맞췄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처음으로 입 맞췄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 애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다. 이름을 부르면 목 끝이 화해질 거 같아서.
철없던 시절의 첫사랑이나 떠올리며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도 없었다. 이제 나는 어른이었고 그때처럼 누군가에게 입 맞추거나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더욱이나 같은 여자애한테. 성적 지향이 어땠든 이 나이엔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남자 만나서 결혼이나 하는 게 훨씬 편한 거잖아.
에어컨도 안 나오는 우울한 오후였다. 모두의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니 선풍기가 탈탈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홈페이지 상단에는 어느 독거노인이 선풍기를 틀고 자다가 질식했다는 조그마한 뉴스가 떠있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나이를 아주 많이 먹은 노인이 된 것 같았다. 나도 질식해버릴 것 같아서 뉴스창도 선풍기도 꺼버렸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누가 죽었건 어떻게 됐건.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것도 아주 무미건조한 어른이 되었다. 절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일에 치여 사는데다가 커피중독. 주말에는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이렇다 할 취미 생활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도 없었다. 굳이 애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연인은 그 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소개팅도 번번히 얼굴만 비추고 나왔다. 이따금 주말에 혼자 디저트 가게나 카페에 들러서 무언가를 사먹는 게 내 인생의 낙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사무실 옆에 빵집 생겼더라.”
선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빵집이라면 어차피 그 옆에 있는 프렌차이즈점 때문에 금방 망할 텐데. 우리나라에서 동네 빵집이 잘되긴 어지간히 힘드니까.
“나중에 한번 가볼게요.”
빵집이라면 식빵이나, 소보루 빵이나, 팥빵 같은 게 진열되어 있겠지. 갓 구운 빵 냄새가 날까. 아마도 달짝지근한 냄새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을 터였다. 진득히 콧속으로 들러붙어서 말초신경을 자극하겠지. 그렇다 해도 빵이 어지간히 맛있지 않으면 카페랑 프렌차이즈점에 밀려서 수면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아무래도 카페보단 음료수나 서비스 같은 게 덜 되어있지 않나.
“어, 거기요? 거기 알반지 점장인지 완전 예뻐요.”
남직원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맨날 얼굴도장 찍잖아요, 하고 웃는 게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사실 나는 거기서 일하는 여자가 얼마나 예쁘게 생겼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예쁘다니까 괜히 궁금해서.
“어떻게 생겼는데 그래?”
긴 생머리에 웃을 때 보이는 가지런한 이가 예쁘고, 보조개가 들어가고, 앞치마가 잘 어울리는 여자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애를 떠올렸다. 웃을 때 보조개가 들어갔었다. 그림 그릴 때 두르는 앞치마가 잘 어울렸었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길 때마다 보이는 둥근귀가 참 예뻤었다.
“그리고요, 저번에 보니까 그림을 그리고 있었어요. 커피를 붓 끝에 찍어서 도화지에 웬 여자를 그리고 있더라고요.”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하고 남직원이 덧붙여 말했다. 정말로 그 애 생각이 났다. 그래서, 혹시나, 혹시나 해서.
내가 다시 한 번 네 손에 입을 맞출 수 있다면 어떤 향이 날까. 여전히 흑연냄새와 물감냄새 그리고 종이 향이 날까. 아니면 밀가루와 이스트와 녹은 설탕냄새, 그리고 커피향이 날까. 너는 커피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으니까. 봄이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니까 그게 네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빵집 문을 열었을 때 네가 햇볕 드는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 넌 나무 아래서 이젤을 펴놓고 나뭇잎 새로 햇볕을 맞으면서 연필을 놀리곤 했으니까.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만약 그 자리에 네가 있다면 넌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소를 지을까 아니면 놀란 표정으로 날 봐줄까. 누군지 기억 못하고 있으면 어쩌지. 다시 만나는 너도 봄 같을까. 많이 좋아했는데.